비피동성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하나님의 불변성
2023년 10월 31일
사랑, 정의, 그리고 진노
2023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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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피동성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오해된 하나님의 속성”의 네 번째 글입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는 전통은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서 나눠 먹는 식사, 혹은 친교 식사이다. 음식이 풍성해서 모두가 배부르게 먹으며 잔치를 즐긴다. 그런데 접시를 들고 음식과 디저트 옆을 지나가다 보면 특정 음식은 담고, 다른 음식은 그냥 지나친다. 어째서 그럴까? 왜 어떤 음식은 선택하고 다른 음식은 선택하지 않을까?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음식이나 디저트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영향인가? 각각의 음식을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고, 좋은 음식에 끌리게 되고 나쁜 음식은 거부한다.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멀리하기 위해 행동할 때, 우리는 그 음식과 음식에 대한 인식에 의해 변화되고, 움직이고,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감동이되는(passible)’ 피조물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행위자(agent)의 동작을 받는 수동자(受動者, patient)가 될 수 있다. ‘수동자’라는 단어와 ‘감동을 느끼는’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받거나 겪는다”를 의미하는 어근 ‘패티(pati-)’에서 유래한다. 수동자는 행위자의 행동을 겪거나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감수성이 있다는 것은 행위자의 동작을 받는 수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식이 놓인 줄(potluck line)을 지나가면서 특정 음식은 접시에 담고, 다른 음식은 피한다는 것은,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가까이 하고,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멀리하는 변화와 운동, 움직임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이런 음식들은 음식의 좋고 나쁨에 의해 수동자(受動者)(동작을 당하는 대상)인 우리를 움직이는 행위자들이다.

좋은 것으로 향하고, 나쁜 것에서 멀어지는 이러한 움직임, 즉 이런 “겪음”은 열망(passions)이다. 우리는 이런 열망에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자신감과 두려움, 자비와 복수 같은 이름을 부여한다. 에베소서 2:3절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것처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passions)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다. 

하나님은 진실한 감동이나 감정적 조작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으로 무능한 자들을 도우신다. 따라서 무능한 자들은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라 자비 그 자체이심을 알기 때문에 항상 그분을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은 자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 그 자체이시다. 

열망은 인간의 몸과 영혼의 욕망을 수행한다. 열망은 우리가 좋다고 인식하는 것을 향해 가거나 나쁘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멀어지려는 움직임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명령한다. 이전 번역에서는 “위에 있는 것들에 애정[즉, 열망]을 두라”고 했는데, 이는 “타락한 인간과 그의 죄악된 본성에 의해 정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하신 선함에 끌리며, 하나님이 정의하신 악함에 혐오감을 느끼라”는 의미이다.

감동을 느끼는 피조물의 삶, 즉 열망의 경험은 모든 종류의 외적 힘으로 일어나는 움직임과 운동, 기복, 변화의 끊임없는 흐름이다. 초록 불이 켜지면 행복하다가도 빨간 불이 켜지면 한순간에 기분이 확 달라진다. 좋아하는 스포츠 팀이 득점하면 큰 만족감과 자신감을 얻지만, 상대 팀이 득점하면 좌절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감동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기에 비피동적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경배할 수 있다. 비피동성은 부정(negation)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 “열망이 없다”거나 하나님이 비피동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열망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행위자(agent)의 동작을 받는 수동자(受動者, patient)가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 안에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신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변화시키고 그분이 인식된 선을 향해 가거나 또는 인식된 악에서 멀어지게 하는 힘을 창조주에게 행사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할 이시”(롬1:25, 고후11:31)다. 또한 우리의 의로움이나 악함이 하나님을 변화시키지 못한다(욥 35:5-8).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피조물에게 있는 것 같은 열망이 아니라 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거나 자비를 베푸시도록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으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도록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열망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이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만큼이나 사랑이기를 멈출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과 같은 열망이라면 우리의 선함과 악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며,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전지전능하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변화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데, 이는 우리 안에 인식된 선함을 근거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무한한 충만함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라고 선포하게 하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리 안에서 인식하는 어떤 것에 의해 자비를 베푸시도록 움직이지 않으신다. 우리의 자비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향해 심금(心琴)이 끌리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많은 자선 기부는 사람들을 자비로 이끈 결과이다. 그런 시스템에는 부패가 있을 수 있고, 부끄럽게도 우리는 많은 사람의 진정한 고통을 무시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비로 이끌려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열망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감동이나 감정적 조작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으로 무능한 자들을 도우신다. 따라서 무능한 자들은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라 자비 그 자체이심을 알기 때문에 항상 그분을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은 자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 그 자체이시다.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라고 말하자.

비피동성은 부정이기 때문에 인간의 피동성과 대조하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열망은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며, 우리가 모든 종류의 행위자의 행위를 받는 수동자가 될 때 발생하는 변화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열망이나 움직임, 변화 또는 존재의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피조물에게 부어주시는 완전하고 무한하며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을 찬양하자.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시 145:9-10)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사무엘 D. 레니한
사무엘 D. 레니한
사무엘 D. 레니한(Samuel D. Renihan) 박사는 캘리포니아 라미라다에 있는 트리니티 개혁 침례교회(Trinity Reformed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God without Passions』과 『The Mystery of Christ, His Covenant, and His Kingdom』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