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에서의 제자도
2026년 01월 07일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란 무엇인가?
2026년 01월 07일왜 성찬(주의 만찬)은 은혜의 방편인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제자도의 기초”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교회가 ‘복음 중심’으로 서도록 권면하는 책과 자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복음 중심의 부모가 되고, 복음 중심의 설교문을 쓰며, 복음 중심의 공동체로 살아가라고 부름받았다. 이 모든 것은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어떻게 십자가, 곧 주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사역의 중심에 둘 수 있을까? 감사하게도 목회자들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짜내려고 골머리를 앓으며 궁리하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주 예수님께서 친히 분명한 지침을 남기셨다.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앉아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찬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소박한 식사지만, 구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이미 성찬의 한 가지 복을 볼 수 있다. 성찬은 우리의 몸이 결코 찢기지 않도록 예수님의 몸이 찢겼고, 우리가 피 흘리지 않도록 그분께서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사망의 저주가 그분께 임했고, 그 결과 생명의 복이 그분의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성찬은 골고다에서 단번에 드려진 희생 제사에 무언가를 보태거나 그것을 계속 이어 가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외침이 수 세기에 걸쳐 울려 퍼지며, 성찬을 통해 다시금 선포된다. 그분께서 이미 피를 흘리셨으므로, 다시 피 흘릴 필요가 없다. 그 제사는 완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은 일종의 ‘보이는 말씀’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한 복음을 시각적인 형태로 우리의 눈과 손과 입술과 입에 ‘설교’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두 살배기 딸이 공원에서 막 돌아와 내 서재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 나는 딸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 올려 꼭 끌어안고, 볼에 입 맞출 수 있다. 이 포옹과 입맞춤이 어떤 의미를 더하는가? 그것은 새로운 정보를 더하지 않지만, 사랑한다는 나의 말을 강화하고 확증한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로서, 십자가의 복음을 확증한다. 즉,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5문답에서 말하듯이,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내가 눈으로 확실히 보는 것처럼, 주님의 몸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드려지고 찢기셨으며, 주님의 피가 나를 위해 쏟아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그런데 성찬을 은혜의 방편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이보다 더 많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성찬은 단순히 시각적 보조 수단이 아니다. 목사가 앞에 서서 단지 떼어진 떡과 포도주 잔을 보여 주기만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떡과 잔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우리가 매우 평범한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성찬을 식사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찬이 은혜의 방편인 두 번째 이유를 깨닫게 한다. 즉,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적 양식으로 받는 자리이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먹는다.
모든 신자에게는, 말하자면 두 ‘생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육체가 있으며, 인자하신 하나님은 육체적인 양식을 통해 우리의 육체를 강건하게 만드신다. 아마 오늘도 우리는 빵을 먹었을 것이고, 어쩌면 포도주도 한 잔 마셨을지 모른다. 둘 다 우리의 몸을 강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영적 생명도 있다. 우리는 신자로서 성찬에 참여해 영적인 양식을 받는다. 물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떡과 포도주로 남지만, 바울은 이 식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오래된 영어 번역본에서는 ‘참여’라는 의미의 ‘participation’ 대신 ‘교제’라는 의미의 ‘commun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흔히 성찬을 ‘거룩한 교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핵심 구절은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이것은 분명 신비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우리가 평범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게 되며, 그분과 연합한 가운데 더욱 강건해진다. 성찬은 단지 은혜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를 베푸는 선물이다. 어느 교회도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값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빈손으로 나아와, 예배 초반에 선포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았듯이, 성찬을 통해 다시금 그리스도를 받는다. 이런 이해는 우리의 초점을 미묘하게 바꾼다. 즉, 성찬은 우리가 경건하게 그분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시간이기 전에,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은혜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는 시간이다. 성찬의 주된 방향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은혜의 움직임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