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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 19일우리가 바라보는 것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잘 알려진 성경 이야기 설명하기”의 여덟 번째 글입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은 마음의 초상이며, 눈은 마음의 해석자이다.” 그로부터 1600년 후, 셰익스피어도 그와 비슷하게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내면 세계가 눈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어 왔다. 말이 속마음을 숨길 때조차 눈은 그것을 보여 줄 것이다. 요지는 눈이 사실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은 양방향으로 통하는 창이다.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빛은 안으로 들어오는 빛에 따라 좌우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마 6:22,23). 눈은 마음이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또한 마음은 눈이 바라보는 그것을 계속 소중히 여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바라보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하기에 주 예수님은 잘 훈련되고 순전한 ‘성한 눈’을 가지라고 권면하신다.
성경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나온다. 롯의 슬픈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그것은 육신적인 관점으로 현실을 판단한 잘못된 확신에서 시작된다. 아브람이 롯에게 어느 땅을 가질지 선택하라고 했을때, 우리는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창 13:10)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롯의 눈에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던 그 땅은 사실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후 롯의 삶에서 보듯이, 소돔의 악을 바라보면서 지낸 시간은 슬프게도 그의 정서와 도덕의 나침반을 오염시켰다(창 19:8,33-38 참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정서가 눈을 다스리고, 눈은 우리의 정서를 흔든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시 101:3)라고 결단한다. 욥도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욥 31:1)라고 서원한다. 안타깝게도 다윗은 ‘왕궁의 옥상에서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처참하게 넘어졌고(삼하 11:2 참고), 욥은 자기 눈으로 본 것만을 토대로 판단함으로써 잘못을 저질렀다(욥 13:1 참고).
이스라엘 백성의 눈은 상상할 수 없는 악을 낳았다.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대로,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았고’(1절 참고), 이에 아론은 그들이 볼 수 있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눈이 탐욕을 품었고, 그 탐욕이 극악한 죄를 낳았다.
여기서 눈으로 지은 첫 번째 죄를 언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여자[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그러자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현실을 보게 되었다(7절 참고). 슬프게도 그 이후로 나타나는 모든 안목의 정욕은 바로 그 동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엡 1:18 참고),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정서가 심긴다. 이제 그는 보지 못하는 그분을 사랑하고(벧전 1:8 참고), 본 적 없는 도성을 찾으며(히 13:14 참고),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유업을 간절히 기다린다(고전 2:9,10; 벧전 1:4,5 참고). 그런데도 우리의 눈은 여전히 간사하다.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과 함께,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도 악이 가까이 있다고 고백하게 된다(롬 7:21 참고).
우리의 마음은 눈을 따라가기 쉬우므로(욥 31:7 참고), 눈앞에 무엇을 두는지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눈으로 건전하지 않은 것들을 주목하지 않으며,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빌 4:8) 만한 것을 바라보는 일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행할 수 있는가?
금송아지 사건 직후,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이때 그는 자기 얼굴에서 두려울 만큼 광채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짐작건대, 모세의 얼굴이 빛난 것은 그가 여호와와 교제했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빛났고, 말을 마치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출 34:29-35 참고).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 사건을 상기시키며,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분을 닮아 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적어도 아직은 주님을 눈으로 직접 바라봄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변화된다. 그리스도를 참모습 그대로 보고 그분과 같이 변화될 때(지복직관)가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끊임없이 바라보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요일 3:2 참고).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그분을 마침내 닮게 되는 그날은 참으로 복될 것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무엇을 바라보는지 조심하라. 당신은 결국 바라보는 그것을 닮아 갈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당신을 제자 삼으려는 형상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보는 것이 그 모든 형상들을 합친 것보다 더 아름답다. 그날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시 26:3).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