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문화는 어떻게 변화에 기름을 붓는가
2025년 10월 05일
진리와 실천의 타협
2025년 10월 09일가상의 우정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멋진 신세계”의 네 번째 글입니다.
온라인 사회 네트워크는 본질상 악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위험성이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공동체보다 고립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합리적으로 안전한 한 가지 예견을 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겠다. 여러분은 아마 이 기사를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필자의 글이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하지만 필자의 지루한 글이 이 기사를 끝까지 읽는 데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이 예견은 주의 집중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제시하는 믿을만한 통계에 기반이 두어져 있다.
<애틀랜틱 먼슬리(The Atlantic Monthly)>가 몇 달 전에 도발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구글은 미국인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 거인 구글과 그 공모자들은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고, 매기 잭슨의 최근 저서의 제목과 같이, 더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디지털 시대에는 집중력을 갖기가 더 힘들어졌다. 멀티태스킹 작업은 우리의 사고를 단편화하고, 조용히 반성할 시간들은 재촉하는 문자 메시지로 방해받고 있다. 몇 문단을 읽고 나면 집중력은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심오하고 사려 깊은 독서 습관을 잃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모두가 상당히 수준 높은 컴퓨터 전문가다. 과학기술 측면에서 보면 이동 전화,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또는 그 다음으로 앞으로 등장할 무엇이든 그 다음에 오는 것을 통해 크게 확대된 소셜 네트워크가 전자 시대의 필수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거의 반성해볼 겨를도 없이 소셜 네트워크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독서 습관을 빼앗아간 것 외에, 소셜 네트워크 세계가 우리에게 가져온 결과는 최소한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는 우정 관념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감소시킨 것이다.
1,035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친구를 가진 친구가 있다. 페이스북 기준에 따르면 그 정도 수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동시에 그것은 거짓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타나는 결과는 대부분 넘쳐나는 정보를 과시하는 것 정도다. 사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대장 내시경 검사 보고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반면 여러분과 진실로 가까운 사람들은 왜 자기들이 여러분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트위터를 통해 알아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긴다.
아무리 페이스북이 친구들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계속 알고 지낼 수 없다. 나도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친구들을 모았다. 적어도 4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 4분의 1은 만나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교제를 나누었던 적도 최소한 두 번은 된다.) 무엇보다 아무도 이 교제의 비용을 추산할 수 없다. 매기 잭슨이 지적한 것처럼, 페이스북 친구들은 콩팥을 기증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나는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우리가 곧 만나기를 바란다”는 문구를 담아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말은 상투적인 문구가 되고 말았는데, 이제 그런 말을 안 쓰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정이란 실제 만남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예증한다. 전자 문화는 정신을 벙벙하게 붕 뜨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갈라놓는다. 여기서 역설은 전자 문화는 우리를 가까운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한편 먼 사람들과는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거리를 극복하고 “다시 연결되었다”고 헛된 자랑을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고립된다.
이런 과학기술의 피상성은 전자-갈등(e-conflict)의 확산으로 예증된다. 이-메일을 주고받는 사람은 누구든, 심지어는 오랜 친구와도, 심각한 불통을 겪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기가 막힌 온라인 유머로 생각했던 것을 보내, “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내가 보낸 유머에는 적절한 배경에 비추어 볼 비-언어적인 전달 요소(non-verbal messaging)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8장에서 우리 주님이 직접 대면해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설상가상으로 소셜 네트워크는 우정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체면을 세우기 위한 욕망으로 친구들을 모집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목을 끌 때 온라인 인격이 조심스럽게 형성된다(심지어는 다중 정체성과 젠더 벤딩[성 역할 파괴]까지 생긴다). 크리스틴 로젠은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네 자신을 나타내라”는 말로 바뀐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수치심이 거의 없다. (나의 한 지인은 페이스북의 자신의 지위를 자신의 저술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사용했다.) 심지어는 새로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공적 일기의 방대한 대양 속으로 가라앉는다. 로젠은 페이스북을 “단조로운 독특성, 판에 박힌 개인성, 특이한 동일성을 가진 매우 둔한 곳”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이런 일들로 허비하는 시간은 참된 친구들과 생각 깊은 서신을 주고받는 데 쓰는 시간을 빼앗아 간다. 수십 명의 친구들을 “참견할” 수 있는데, 왜 손으로 편지를 쓰고 부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겠는가? 거기다 사이버 꽃은 실제 꽃보다 훨씬 값이 싸다. 결국 우정은 경쟁이 된다. 나는 언제 내 친구의 이동 전화 서비스에 “좋아하는 다섯 사람” 안에 낄 수 있을까?
이상의 모든 사례에서 보듯 우정은 실리적인 목적으로 떨어질 때 값싼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참된 우정을 인정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를 포함하는 가족, 또는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도록 명령받은 이웃과 달리, 우정은 독특한 근거에 따라 전개된다. 우정은 선택을 함축하고(여러분은 가족이나 이웃은 택하지 않는다), 또 높은 수준의 신뢰, 존중, 사생활이 요구된다. 요약하면 우정은 참되려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난주에 일 때문에 한 젊은 여성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녀가 옛 친구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연락한 것을 삼촌에게 서둘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 왔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우리가 한 것이 연락인가? 어쨌든 “연락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지금 친구인가? 페이스북은 실제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얄팍한 친근함을 기초로 친구와 친구(또는 친구의 친구)를 서로 맺어 준다. 그것은 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흐르는 물과 같다. 어쨌든 여러분의 룸메이트가 과거 20년 넘게 여러분과 연락이 끊겼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사실은 여러분이 먼저 연락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소셜 네트워크의 몇 가지 적합한 용도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 아침에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나를 오래 참아 준 <테이블톡> 편집자 크리스 도네이토가 건강한 두 번째 아기의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된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흠, 아마 그것 때문에 그는 나의 기고문의 기한이 지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이미 확립된 관계를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스북이 다른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는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두 가지 추가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페이스북을 통한 연락이 진정 필수적이고, 더 중요하게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과 견줄만 한가? 인터넷은 주고 빼앗는다.
사회 네트워크를 옹호하는 자들은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게 해주고, 너무 빨리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의 균열들을 고쳐준다는 소셜 네트워크의 약속을 열렬히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을 확고하게 지키는 곳은 교회 말고는 어디에도 없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갖고 있는 열망은 개인이 친구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열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교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지 살펴보면 놀랍다. “과학기술의 목사들”은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데 열심이다. 한 모범적인 교회는 직접 만나는 관계를 가상 세계의 관계로 대체시키는 데 관심이 없는 회의적인 사람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정확히 교회가 할 일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터넷을 통한 관계는 현실 세계의 관계를 희생시켜야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최근에 한 가족이 교제 시간이 없다는 불만을 터뜨리고 우리 교회를 떠났다. 그 가족이 교회에서 교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교회는 회의를 통해 이 불만을 매우 심각하게 다루었다. 결국 그 가족의 어머니가 자기는 “내가 홈스쿨링 네트워크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하루 종일 페이스북 채팅을 할 수 있는” 교제를 갈망했다고 고백했다.
셰인 힙스는 『깜박이는 픽셀』(Flickering Pixels)에서 이렇게 말한다. “디지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 소셜 네트워크—교회나 어떤 가정의 식사와 같은 네트워크—에서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죽이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예방접종을 한다. 여러분은 온라인에서 예배드리려고 로그인 할 때 왜 진정한 소통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가? 온라인 교회에는 필요한 모임이 없기 때문이다!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역간, 원제: Bowling Alone)이라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사이버 교회를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 가운데 하나다.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정말로 다양하다. 하지만 가상 세계가 갖고 있는 동질성은 사실은 사이버 격리성이 공동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퍼트남의 말에 따르면 인터넷은 “본질상 우리의 사회적 자본의 몰락을 반전시킬 수 없다.”
실제 공동체가 불편함이나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가상 공동체는 참여만큼이나 탈퇴도 무척 쉬운 이점을 갖고 있다.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는 것처럼 간단한 방법으로 사라질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가 이메일 수신함 아래 매장되어 있는 사람에게 첫 사이버 비석을 헌정할 것인가?) 또는 사이버 해충을 “언-프렌드시키는”(곧 친구 목록에서 삭제시키는) 원 클릭 수단이 있다. 이런 퇴출 전략을 가진 소셜 네트워크는 생활방식 집단(life-style enclave, 역주—로버트 벨라가 처음 사용한 말로 일부 생활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외모, 소비, 레저와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 자기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집단을 가리킨다)보다 공동체의 특성이 약하다. 한 사회학자는 소셜 네트워크를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로 적절하게 묘사했다. 물론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는 인터넷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활성화시키고 이 사상들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인터넷의 멀티태스킹, 분할 화면, 신호음 문화에 강력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 대학의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ze)는 “하이-테크 마음의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구분할 것을 권면한다. 과학기술의 사용을 절제하는 것이 영혼, 지성, 교회에 유익하다. 우리는 관심 분야를 확대시키고 친구들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환경을 재형성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이 논문을 끝까지 읽었다면 작은 출발을 한 것이다. 이제 그 다음 부분을 읽으라. 그런 다음 친구에게 편지를 쓰라. 문자 메시지나 블로그에 쓰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그건 Cheating(역주: 시험 볼 때 답을 보고 쓰는 것처럼 잔꾀를 부리는 것을 말함)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