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려운 요소
2025년 10월 11일
가장 멋지고 가장 새로운 세계
2025년 10월 19일너무 좋아 믿기지 않는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멋진 신세계”의 여덟 번째 글입니다.
나는 1935년에 세례를 받았고, 가장 큰 개신교 “주류” 교파의 한 교단에서 자랐다. 그러나 12살 때쯤 우리 교회에 부임한 목사들에게 실망했다. 그들의 모든 설교가 당시에 매우 인기 있었던 구(舊) 자유주의 사상에 젖어 있었고, 그래서 부모에게 지역에 있는 정통 장로교 교회로 옮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교회를 옮겼고 주님은 곧 내게 깊이 있는 성경적 신앙을 갖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오늘날 미국의 상황을 확인해 보면, 주류 교회들이 성경적 신앙으로 되돌아가고 복음을 환영하여 얼싸안기 보다는 단순히 “새로운 교인을 끌어당기는 법”을 다양하게 제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 교인은 매년 줄고 있다. 그리고 더욱더 슬픈 것은 지금 복음주의적(evangelical)이라는 말이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들은 여전히 복음주의 교회를 자처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한 세기 전 구 자유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 “문화 순응” 신학을 취했다.
물론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가 여전히 성경적 복음을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교회가 기쁨이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보다 청중들이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당연히 여기고, 더 나은 배우자, 부모, 돈 관리자 등이 되는 법과 같은 “실제” 문제들을 다루는 설교를 주로 전한다. 그리고 서글픈 아이러니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근본 항목들의 견고한 기초가 없이는 이 설교를 듣는 자들은 이 실제적인 목표조차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만약 우리의 교회들이 진실로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믿음과 교인수를 증가시키려면, 청중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전제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믿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롬 10:13~15). 그리고 여러분은 크신 목자가 위하여 죽은 양으로서 복음을 이미 받은 것으로 당연시하지 말고 여러분이 뽑은 사역자를 통해 여러분의 교회 안에서 복음이 선포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랄만한 조사 결과를 확인했다. 최근의 한 연구 조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1950년대(필자 세대)에는 성인 가운데 75퍼센트에 달했으나 다음 세대(필자의 자녀 세대)에는 35퍼센트로 줄어들었고, 조사가 진행되던 당시(필자의 손자 세대)에는 성인 가운데 15퍼센트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 조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교회에서 자란 18세 청년들이 걱정될 정도로 자기들의 믿음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을 어떻게 붙들고 믿음을 유지시켜야 할까?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소위 “실천” 설교 주제가 복음을 대체하는 일이 왜 벌어졌을까?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캐나다 출신으로 1960년대의 미디어 전문가인 마셜 맥루한—“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유명한 말을 한 사람—은 “교회의 문제점은 나쁜 소식이 뉴스인 세상 속에서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고 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단순히 기쁜 소식인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기적적인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소식은 여러분의 이웃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법에 관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식보다 믿기가 더 어렵다. 물론 복음은 너무 좋아 믿어지기 거의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많은 증거들을 통해 증명되기 때문이다(히 2:3~4).
여러분에게 요 11:17~45의 놀라운 내러티브를 다시 읽어보라고 권면하고 싶다. 주님은 과거에 마르다에게 하셨던 질문을 지금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물어보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마르다가 했던 대로 답변하도록 역사하시기를 바란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대답이 얼마나 분별력이 있는가? 이에 예수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선언을 하셨다. 곧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나올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이어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정확히 부활을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크신 구원 행위로 간주했다. 마르다는 부활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로 알고 있었다(24절).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의 크신 구원 행위를 몸소 행하신 그분이 여기 그녀 앞에 서 있다는 더 깊은 진리가 마르다에게 주어진다. 그분이 이미 오셨다! 세상에 오셔서 새 세계, 새 시대를 여실 것으로 약속된 분이 여기 계신다. 생명의 선물인 부활, 이것이 메시아의 사역이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님 안에서 지금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자신의 능력에 관한 예수님의 권세 있는 증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 있는 표적도 갖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고, 그러자 실제로 죽은 자가 살아서 무덤을 나왔다(43~44절). 예수님은 부활의 권세를 행사하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말씀뿐만 아니라 행위로도 자신이 참된 마지막 구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무신론자 소설가로 내가 살던 시대에 대학생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던 알베르 까뮈는 『페스트』에서 자신의 영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한 가지 요점을 말한다. “구원은 내게 너무 거창한 말이다. 나는 그렇게 높은 목표는 갖지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높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 영원한 부활 생명이 있다는 기쁜 소식은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