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좋아 믿기지 않는다?
2025년 10월 15일
스가랴에 대해 알아야 할 세가지
2025년 10월 19일가장 멋지고 가장 새로운 세계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멋진 신세계”의 아홉 번째 글입니다.
인간은 상상으로 미래를 생각할 때 길몽 아니면 악몽을 꾸는 경향이 있다. 길몽은 인간의 능력은 완전한 세계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고 가정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악몽은 최후의 심판 시나리오를 피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는 현실주의자들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히 높은 미래의 실재로 들어가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 실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는 어떤 길몽보다 더 나은 소망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세계로 가는 여정은 피가 낭자하고 무시무시한 여정임을 인정하는 용기와 결부되어 있는 소망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완전한 세계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세계를 더 정교하게 만들기를 갈망했다. 인간의 교만은 재료공학으로 이룬 획기적인 과학기술로 바벨탑을 쌓았고, 높이 솟은 건물을 만드는 데 있어 돌을 깎아내는 것보다 더 우수한 도기 굽는 기술을 발견했다.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사회 공학 기술을 후퇴시키셨다.
그 이후로 역사는 하나님이 없는 완전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혈안이 된 인간의 교만, 권력, 과학기술의 오랜 여정으로 점철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유토피아를 꿈꾸는 환상은 낙관주의가 깜짝 놀랄만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H. G. 웰스는 1차 세계대전의 대량학살에도 아랑곳없이 1923년에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한솔교육 역간, 원제: Men Like Gods)라는 작품을 썼다. 웰스는 사회주의, 과학, 교육으로 모든 악이 근절된 유토피아와 유사한 우주를 묘사한다. 1932년에는 올더스 헉슬리가 염세주의를 비판적으로 풍자한 『멋진 신세계』(원제: Brave New World)라는 작품을 썼다. 이 책에서 헉슬리는 과학기술과 쾌락적 허무주의가 만들어낸 무의미한 쾌락적 실존 세계에 놀라운 환상을 부여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악몽이었다.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9.11 테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두 개를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2008년 마지막 4분기 동안에는 주식 시장 하락으로 오랜 지속되던 연금 투자가 순식간에 거의 뿌리 뽑히는 일이 벌어졌다. 반면에 세계의 실험실들은 과학기술의 경이와 윤리적 악몽들 곧 무선 인터넷 장치와 유전자 변이 실험과 같은 것들을 속속 생산해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예상하기는 더 어려운 힘에 이끌려 매우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형언할 수 없는 영광으로 충만한 미래 세계에 대한 계획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대한 성경의 계시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바벨 평지에서 경이로운 과학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소행을 감찰하려고 하늘 보좌로부터 먼 거리를 내려오셔야 했다. 하나님은 다스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며,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 역사에 개입하여 악을 제어하고 자신의 계획을 열심히 이루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인간의 마음은 이런 계획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적절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자신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전 2:9~10). 하나님의 계획은 가능한 가장 멋지고[용감하고] 가장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계획이다. 그 세계가 가능한 가장 용감한 세계가 될 것은 그 세계가 거주민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용감한 행위에 따라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는 제외될 것이므로(계 21:8) 오직 용감한 자만 그 새 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용감하게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만 들어갈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살기 위하여 용감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 것이며 역사상 가장 용감한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획득된 세계일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완전한 세계로 이끄는 것은 심지어는 피의 순교까지 포함하는 환난의 여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기꺼이 자기들의 고난을 자기들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하지 못할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그 세계는 가능한 가장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린다. 또 그 세계는 새로운 탐험의 세계가 될 것이다. 곧 더 이상 죽음, 슬픔,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사물의 옛 질서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새롭게 될 것이다. 그 세계의 거주민들이 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계 14:3). 그들의 거처—새 예루살렘—도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과 과학기술로 빛나는 새로운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들의 시야도 끊임없이 새로워질 것이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 얼굴을 응시할 때 조금도 지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들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앞장서서 그 길을 용감하게 가야 한다. 그 길은 변화로 가득 차 있겠지만 그 변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로 정해지고 처리된다. 믿음 없는 사람의 상상력은 안으로는 인간의 교묘함과 사악함을 연구하려고 내면을 바라보고, 앞으로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이나 디스토피아적인 악몽을 바라본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위로 성경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앞으로는 용기 있게 땅에서의 남은 여정을 향해 나아가고 소망을 갖고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