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
2026년 08월 15일사랑의 속성
17세기 초에 아일랜드의 대주교 어셔(Ussher)는 한 장로교 목사의 집을 방문해,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경건에 관한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어셔는 가난한 거지로 변장하고서 그 목사의 집을 찾아갔다. 목사는 어셔를 환영하면서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들어가 보니, 목사의 아내가 식구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손님에게 계명이 몇 개인지를 물었다. 어셔는 “열한 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를 매우 무지한 사람으로 여기고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음식을 먹이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날 밤 늦게, 어셔가 변장한 것을 알아차린 목사는 그에게 다음 날 아침에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튿날 어셔는 몸을 씻고 옷을 갖춰 입은 후 강단에 올랐다. 목사의 아내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셔는 이른바 ‘열한 번째 계명’이라 할 수 있는 말씀, 곧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본문으로 설교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목사의 아내는 그 거지가 설교자로 변한 것과, 자신이 그를 그토록 심하게 오판하고 더 큰 사랑을 베풀지 못한 것에 몹시 놀랐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이들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할까? 대중매체는 흔히 사랑을 끌림과 즐거움의 감정으로 제시하지만, 그런 감정은 온도계의 수은처럼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온도계 같은 사랑이 아니라 온도 조절기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 곧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을 다스리는 사랑이 필요하다.
또 어떤 이들은 사랑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심리학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은 혼란을 낳고, 악의와 악을 마주할 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테러범이나 연쇄 살인범을 어떻게 아무 비판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핵심 헬라어인 아가페(agapē)와 관련 동사인 아가파오(agapaō)가 감정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믿는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들을 근거로 삼아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아가페’라는 단어군도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더욱이 감정이 배제된 사랑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우리의 선택을 움직이는 깊은 동기들, 종종 감추어져 있는 그 동기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사랑에 관한 참된 묘사를 찾을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먼저, 바울은 ‘사랑’(KJV에서는 이를 라틴어 caritas에서 온 ‘charity’로 옮긴다)을 “가장 좋은 길”(고전 12:31)이라고 칭송한다. 곧 사랑이 신령한 은사들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고전 12장 참고),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볼 때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삶이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고전 13:1-3 참고). 그러고는 사랑의 속성과 활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 준다(4–7절 참고). 이 구절은 사랑의 본질을 정의한다기보다 사랑의 열매를 묘사하는 데 더 가깝다. 사랑이 어떤 행동과 태도로 이어지는지, 또 어떤 것들을 배격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 묘사는 오래 참는 것으로 시작해 견디는 것으로 끝난다(4,7절 참고). 사랑의 참모습은 시련과 고난과 악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데서 드러낸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위대하게 드러났다.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생각했다. 또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신 일이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사랑의 탁월함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사랑은 활동적인 원리이다”라고 썼다(Works 8:301). 적극적인 활동을 보자면,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을 베푼다(고전 13:4 참고). 사랑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불쾌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딘다. 사랑은 아픔을 친절로 갚고, 악을 선으로 갚으려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출 34:6)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사랑이 행하지 않는 일을 보자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전 13:4 참고).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고 다른 이들이 형통한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질투를 억제한다. 또한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다(4절 참고). 이런 특성들은 사랑이 겸손한 미덕임을 보여 준다. 사랑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태도를 약화시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사랑한다…….하나님을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분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무한히 낮은 자로서 사랑을 행하며, 따라서 그 사랑은 겸손하다”(Works 8:245).
또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전 13:5 참고). 여기서 ‘무례히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기준을 거슬러 행동해 수치를 초래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이끈다(롬 12:17하; 고후 8:21 참고). 이 진술은 율법폐기론적으로 사랑을 이해하는 모든 견해를 배격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에까지 미치며(시 119:97 참고), 그 율법을 이루고자 힘쓴다(롬 13:8–10 참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고전 13:5 참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사랑은 우리를 종이 되게 한다(빌 2장 참고).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5절 참고). 성마른 사람은 자극에 쉽게 격분하지만(행 17:16 참고), 사랑은 분노를 다스린다. 용서한다는 것은 잘못을 장부에 기록해 두지 않는 것이다. 즉, 사랑은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로 돌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롬 4장; 고후 5:19 참고).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참고). 사랑은 의와 신실함을 마주할 때마다 매우 기뻐한다. 반면 누군가가 죄에 빠져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퍼한다. 사랑은 그런 소식을 험담 거리로 즐기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원수에게도 선을 행한다.
고린도전서 13장 6절은 우리 문화에서 흔히 사랑으로 통하는 상대주의적 관용이라는 우상을 책망한다. 악을 미워하는 것도 진실한 사랑의 한 모습이다(롬 12:9 참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크게 드러난 사건은 동시에 그분의 의로우심이 가장 크게 나타난 사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이다(롬 3:25,26 참고).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6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 사이에 널리 퍼진 관념, 곧 사랑이 감정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바로잡아 준다. 사랑은 죄에는 강한 반감을 품고, 의에는 강한 애정을 품는다.
7절에서 사랑에 속한 마지막 네 가지 행동 또는 습관을 설명할 때 반복되는 “모든 것”을, 절대적이거나 예외 없는 보편성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신약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이 사용한 “모든 것”이라는 말은 각각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사랑은 우리가 십자가로서 져야 할 모든 짐을 감당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믿어야 할 모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바라보아야 할 모든 것을 소망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겪어야 할 모든 시련을 견딘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 네 가지를 한결같이 행하도록 우리를 북돋운다.
사랑에는 어려움 한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는 힘이 있다.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믿고 소망한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덕목은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마음은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안에서 기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그의 소망을 살아 있게 한다. 에드워즈는 사랑이 “실천적 믿음의 생명과 영혼”으로, 믿음에 생명력과 열매 맺는 힘을 준다고 말했다(Works 8:139, 330–331). 또한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했다(8:327).
여기서 우리는 죄와 고난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사랑이 끊임없이 역사한다고 말하는 바울의 묘사를 보게 된다. 사랑은 동사이다. 그러나 사랑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이상이어야 한다. 사랑의 본질은 마음의 동기에 있다. 무엇이 사랑을 움직이는가? 이기적인 야망은 사랑의 동기가 될 수 없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즉각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도 사랑을 움직이는 동력은 아니다. 그런 즐거움이 동력이라면, 사랑은 타락한 사람들을 오래 참으며 친절하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은 두 가지 단서를 제시한다. 사랑은 진리, 곧 하나님의 의와 신실하심을 기뻐한다. 그래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사랑의 끝까지 견디는 힘은 믿음 및 소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다. 에드워즈는 사랑이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보는 눈이나 그것을 느끼는 감각”에서 나온다고 말했다(Works 8:333).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께서 사랑을 움직이신다고 결론 내린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우리가 참된 사랑 가운데 행할 때만큼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때는 없다. 그러므로 사랑의 속성과 활동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