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
2026년 02월 05일
감람산 강화
2026년 02월 12일사랑을 나타내면서 진리를 말하라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성령”의 일곱 번째 글입니다.
이전 사역지에서 아내와 나는 매년 저녁 식사에 초대받는 행복을 누렸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사랑하는 한 노부부가 도시에서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로 우리를 데려가 주었다. 그 부부는 우리를 축복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 목적을 이루었다. 식사는 언제나 풍성했고, 대화에는 격려가 넘쳤으며, 저녁 시간은 모든 면에서 즐거웠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성탄의 분위기가 감돌았고, 실제로 우리는 대개 작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함께 되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기억에 남는 저녁 시간을 즐기고 나면, 아내와 내가 두려워하는 어색한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식사 자리가 마무리되고 문을 나서려고 할 즈음이면, 종업원이 웃으면서 다가와 우리를 배웅하며, “모두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친구들은 어김없이 얼굴을 굳히고 찡그린 표정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메시지는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도 성공했다. 종업원은 그 순간이나 그 부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난처해했다.
물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정당성이 도를 넘어서고 있긴 하지만, 성탄절 기간에 퉁명스럽고도 악의적으로 내뱉은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세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팎에 있는 이웃들과 소통하기에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며,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엡 4:15)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들을 설명하면서, 이들이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12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밝힌 목표는 영적으로 안정되고 진리에 뿌리를 내린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도록 격려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들이 합당하게 연합하도록 이끈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진리가 필수적이며,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연합이 그런 성장을 보여 주는 지표라고 주장한다. 그가 에베소 신자들에게 전한 말은 모든 세대는 물론, 특히 우리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라는 바울의 명령은 직설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이 다섯 단어가 얼마나 문화를 거스르는 표현인지 인정해야 한다. “말하라”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이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어려운 진리를 그저 암시하거나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그것을 명확히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단지 넌지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참된 것(진리)”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계시가 영감되었으며, 무오하고, 변하지 않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성경에서 선언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권위를 지닌다.
대체로 우리 세대는 진리, 특히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선언하는 진리뿐만 아니라 진리에 관한 모든 주장을 의심한다. 그들은 사실보다는 감정을, 명제보다는 경험을, 구체적인 것보다는 추상적인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
게다가 이른바 ‘캔슬 컬처(cancel culture)’는 음절 하나라도 현대의 문화적 기대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으면 즉시 공격할 태세로 언어를 감시한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를 말하려면,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R.C. 스프로울(R.C. Sproul) 박사가 지적했듯이, 탐구하는 일에 게으른 것이야말로 복음주의가 피상적인 신앙이 되어 버린 주된 원인이다. 목회자들은 분주한 잡무를, 일반 성도들은 즐길 거리를 선택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연구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룬다. 진리가 먼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쌓이지 않고서는 그것이 우리의 입술에서 나올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사랑 안에서”라는 표현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사랑과 모순된다고 생각하며, 그 둘을 서로 배타적이거나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누군가를 성경적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14절) 요동하기 쉬운 상태로 두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불신자들은 성경적 진리를 불쾌하게 여기며, 그것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생활 방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되, 그것이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만약 누군가가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전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메시지 때문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만 그 결과를 보장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은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신랄함과 뚜렷이 대조될 것이다. 날카로움과 원한, 비난은 사회적 균열을 심화해 국가를 더욱 분열하게 만들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토크쇼 진행자들은 시청률을 더 높이려고 애쓰며, 논란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지지층을, 연예인들은 그들의 관중을, 기업들은 그들의 고객을 부추긴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연기하는 듯하다. 진실한 내용이나 사랑 어린 어조는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말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거나, 지지층을 동원하거나, 추종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적 감수성이 아니라 성경의 명령이다. 우리 세대에서 가장 충실하고도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대변할 사람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다. 진리가 어조보다 더 중요하지만, 둘 다 올바로 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자.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