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될 용기
2021년 12월 14일
복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021년 12월 14일존 칼빈: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450년 전, 존 칼빈에게 교회 개혁의 성격과 필요성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당시 상황은 칼빈의 다른 저술에 영감을 주었던 상황과는 상당히 달랐다. 또한 그 당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개혁에 관해 그가 했던 변호의 다른 차원을 볼 수 있게 해준다. 1544년 황제 카를 5세(The Emperor Charles V)는 신성 로마 제국 의회(the Diet of the Holy Roman Empire)를 스파이어 시(the city of Speyer)에 소집했다.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의 위대한 개혁가인 마틴 부처(Martin Bucer)는 칼빈에게 종교 개혁의 교리와 필요성에 대한 성명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는 주목할 만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친구이자 후계자였던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그가 살던 당시 가장 강력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칼빈은 이 저서를 세 개의 큰 부분으로 구성한다. 첫 번째 단락은 개혁을 해야 하는 교회의 악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단락은 개혁가들이 채택한 이런 악에 대한 특별한 치료책을 상세히 기술한다. 세 번째 단락은 왜 개혁을 연기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상황이 “즉각적인 시정”을 필요로 했는지를 보여준다.
각각의 세 단락에서 칼빈은 자신이 교회의 영혼과 몸으로 부르는 네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교회의 영혼은 예배와 구원이다. 육체는 성례와 교회 통치다. 칼빈에게 있어서 개혁의 큰 원인은 이런 주제에 중점을 둔다. 교회의 악과 이에 대한 즉각적인 치료책과 필요성은 모두 예배, 구원, 성례와 교회 통치와 관련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개혁의 큰 원인은 이런 주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주제들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강조된다. 즉 그가 이 네 가지 영역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지 않고 그 자신이 이 네 가지 영역을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칼빈의 첫 번째 관심은 올바른 예배다.
예배(Worship)
칼빈은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자신의 지혜에 따라 예배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에 의해 명시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모든 예배 방식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세상을 설득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들의 뼈와 골수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들이 고수하는 반대되는 확신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어떤 열의가 있다면 그들이 하는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충분한 승인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열의에서 우리가 시작하는 모든 것을 무익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분명히 가증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분의 명령과 상충된다면 그것을 역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뚜렷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이런 확신은 개혁이 요구되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다. 즉 ‘…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허락하지 않은 새로운 예배를 금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창안한다는 주제넘음에 몹시 불쾌하다고 선언하시고 엄중한 형벌로 그런 예배를 위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소개했던 종교 개혁이 강력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따라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즉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전체 형식은 단순히 부패에 불과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중세 교회의 예배는 “역겨운 우상숭배”였다. 그에게 있어서 우상숭배 문제는 칭의에서 행위의 의라는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것이었다. 둘 다 신적 계시를 대신하는 인간의 지혜로 여겨졌다. 둘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순종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인간의 성향을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칼빈은 우상 숭배자들과의 예배에는 어떤 일치성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교리에서 사악한 사제들에게 반대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희생 제사와 기도로 그들과 친교를 쌓았다. 나는 그들이 우상숭배로 빠져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읽었던 선지자들 가운데 어떤 선지지가 벧엘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는가?”
옛 선지자들처럼 종교 개혁자들은 우상숭배와 당대의 예배의 “외적인 허세”를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예배 순서에 반영된 것처럼 칼빈 시대에 교회의 과장된 말에 대한 해독제는 예배의 경건한 단순성이었다. 그런 단순성은 예배자들에게 예배에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드리도록 장려했다. 즉 “참된 예배자가 마음과 정신을 드리는 것이 의무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완전히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발명하고 싶어 하는데,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형체가 있는 특정한 의식을 수행하고 마음을 그런 의식에 두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칭의(Justification)
칼빈은 다음 주제인 칭의로 넘어간다. 여기서 그는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칭의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지 아니면 행위로 얻는지에 관한 주제보다 더 격렬하게 논쟁이 이루어지는 지점은 없다. 우리의 적들이 그들의 반대에 있어서 칭의보다 더 고질적으로 반대하는 다른 지점은 없다.” “교회의 안전”이 이 교리에 달려 있다. 또한 이 교리에 대한 오류 때문에 교회는 “치명적인 상처”를 초래했고 “파괴 직전까지 갔다.”
칭의는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즉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 어떤 묘사가 주어지는 지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저 주시는 긍휼의 기초 위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마치 그 사람의 의인 것처럼 그 사람에게 전가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그를 양자 삼으시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기독교인의 삶과 경험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즉 “사람에게 그의 빈곤과 무력함을 확신시킴으로써 우리는 그를 진정한 겸손으로 더 효과적으로 훈련시키고, 그로 하여금 모든 자기 확신을 포기하게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자신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로 하여금 그가 소유한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친절함에 귀속시킴으로써 –사실 그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그를 감사로 더 효과적으로 훈련시킨다.
성례(Sacraments)
칼빈의 세 번째 주제는 그가 자세히 조사하는 성례이다. 칼빈은 “… 사람들이 고안한 의식이 그리스도가 제정한 신비와 같은 위치에 놓였다”라고 항의한다. 그는 특별히 주님의 만찬이 “과장된 전시회”로 변형되었다고 항의한다. 하나님의 성례에 대한 그런 남용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항의하는 첫 번째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사람들이 화려한 의식을 즐기지만 그 의식이 담고 있는 의미와 진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찬에서 표지가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설명되지 않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은 초대 교회에서 우세했던 성찬 교리와 실천의 단순함이 사라졌다고 한탄한다. 이것은 주님의 만찬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성찬의 희생, 화체설(transubstantiation) 그리고 성별(聖別)된 빵과 포도주에 대한 예배는 비성경적이고 성례가 담고 있는 참된 의미를 파괴한다. “성찬은 경건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수단이 되었어야 했지만 주님의 만찬의 신성한 상징이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남용되었다. 그것들을 응시하고 예배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결코 한번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다.” 성찬 희생이라는 생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이 파괴된다… 마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한번 죽으실 때 충분한 것을 이루시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루에 천 번 희생 되었다.”
칼빈은 주님의 만찬의 참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요약한다. 즉 “… 우리는 모두 사람에게 믿음으로 오라고 권한다…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서 주님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다고 설교한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와 결합되고 빵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즉시 덧붙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빵과 포도주가 상징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과 그분의 모든 구원하는 혜택을 믿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주신다.
성례에 관한 칼빈의 논의를 이렇게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단지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그가 논의한 것을 살짝 맛보게 할 뿐이다. 그는 다섯 개의 추가적인 성례가 있다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반박할 뿐만 아니라 세례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교회 통치
마지막으로 칼빈은 교회 통치라는 주제로 관심을 돌린다. 그는 이것이 잠재적으로 중요한 주제라고 언급한다. 즉 “만약 내가 교회 통치의 잘못을 자세히 검토하려 한다면 나는 결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목회 직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춘다. 가르침의 특권과 책임이 이 직분의 핵심에 놓여 있다. 즉 “… 가르침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참된 목사가 아니다.” 종교 개혁의 위대한 성취 중 하나는 설교를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적당한 위치로 회복한 것이다. “…말씀의 일상적인 설교가 없다면 우리 교회 가운데 어떤 교회도 교회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목회 직분은 거룩함을 가르침과 연결해야 한다. “… 교회를 주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하고 더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빛나야 한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리더십이 거룩함을 가르치고 추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에 대해 “가장 잔인한 폭정”을 행사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지 않은 권력과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항의한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묶었던 비성경적 전통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자유를 가져왔다. “따라서 신실한 자들을 잡고 있는 부당한 속박에서 그들의 양심을 구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던 것처럼 우리는 그들이 자유롭고 인간의 법의 속박에서 자유롭다고 가르쳤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샀던 이런 자유는 침해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로마 교회는 특히 사제 서품을 위해 사도적 계승을 중요시했다. 칼빈은 개혁주의의 안수는 그리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진정한 가르침과 실천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따라서 누구도 안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교리의 순수성에 의해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Reformation)
칼빈은 이 논문을 개혁의 과정에 대한 성찰로 마무리한다. 그는 종교 개혁의 시작을 “온화한 손”으로 개혁을 요구했던 루터에게 돌린다.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의 반응은 “폭력과 잔인함으로 진리를 억압”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전쟁이 칼빈을 놀라게 하진 않았다 “… 복음의 이런 일괄적인 운명은 복음의 처음 시작부터 큰 논쟁 가운데 설교 되어 왔고 항상 심지어 끝까지 큰 논쟁 가운데 이 세상에서 설교 될 것이다.”
칼빈은 논쟁의 중요성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 이런 문제를 정당화한다. 그는 “기독교의 전체 핵심”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최소화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에 순종하면서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분파주의적이라는 어떤 제안도 거부한다. 즉 “…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교회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하려는 것을 조심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말할 때 나는 그분이 자기 피로써 인치셨던 그분의 복음의 교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순수한 교리에 동의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연합할 때 우리 사이에 거룩한 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이 고정된 요점이 되게 하라.” 일치를 제공하는 것은 교회라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참된 교회라는 실체다.
그런 후에 칼빈은 교회 개혁이라는 대의를 누가 적절하게 이끌 수 있느냐는 실천적인 질문으로 관심을 돌린다. 그는 교황이 교회를 이끌거나 가장 강력한 언어로 개혁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즉 “나는 로마 교황청(See)이 사도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거기에는 충격적인 배교 외에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교황은 맹렬히 복음을 박해할 때 그의 행동으로 자신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교황은 베드로가 세웠던 모든 체계를 파괴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교황은 참되시고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교회를 잘라낸 후에 자신의 폭정으로 교회를 찢고 절단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많은 사람이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보편적인 종교 회의를 요구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칼빈은 그런 종교 회의가 결코 소집될 수 없고 만약 소집된다면 교황이 그 회의를 통제할 것을 우려한다. 칼빈은 교회가 초대 교회의 실천을 따라야 하고 다양한 지방 또는 지방 협의회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어떤 경우에도 대의는 궁극적으로 모든 개혁 노력에 적합하다고 보는 축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원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사역은 이 세상에 유익한 것으로 드러나길 바란다. 하지만 사역에 이런 효과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