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2025년 12월 12일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2025년 12월 16일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예수님의 자기 선언들”의 네 번째 글입니다.
수년 전, 나는 어느 저명한 학계 인사가 자신의 유서 깊은 캠퍼스에 관용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이어서 그는, 자기 대학에서는 관용 없는 태도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아이러니를 놓쳐서는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관용’을 자랑하면서도 배타적 주장이라면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해 배타적으로 주장할 때면 더욱 그렇다.
성경은 배타적인 주장으로 가득하다. 생명과 죽음의 대립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이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가인이 드린 불신앙의 제사와 아벨이 드린 믿음의 제사, 에서와 야곱의 대조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예수님도 좁은 길과 넓은 길이라는 대조를 통해,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고 다른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한다고 가르치심으로써 생명과 죽음을 보여 주셨다(마 7:13,14 참고).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실 때, 그 좁은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화되어 드러난다. 이런 배타적 주장은 AD 2세기의 『디다케』(Didache)에서부터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 외의 문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예수님은 어떻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로 답할 수 있으나,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는 객관적인 답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답이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성육신한 하나님이시므로 오직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주관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존재와 행하신 바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분의 구원이 개인에게 적용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길’이 되신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도발적인 개념이었다. “나는 ~이다”라는 자기 선언은 신성을 단호히 주장하는 것이었고, 그들도 그것을 알았다(요 10:10–33 참고).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길이시며, 또한 사람이시기 때문에 길이시다. 아담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렸고, 예수님은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그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셨다(롬 5장 참고). 예수님은 아담이 따르지 못했던 의와 거룩함의 길을 온전히 따르셨다. 그분은 여인에게서 나셨으므로, 아담을 대신하실 수 있었다(갈 4:4 참고).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완전한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었다(사 53:12; 벧전 1:24 참고). 그분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다(롬 5:11; 고후 5:18–21 참고). 오직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그분만이 길이실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분은 또한 ‘진리’가 되신다. 같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진리의 원천임을 밝히신다(요 8:31,32 참고). 그 진리는 사람을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한다(요 8:34,35 참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누군가는 “그러나 그분의 말씀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계신 말씀이며 진리를 주시는 분에게서 말씀과 진리를 분리할 수는 없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에서도 기록된 말씀을 인격화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리이시다(렘 10:10 참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명’으로 선언하신 배타적인 주장으로 넘어가 보자. 성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말씀하신 하나님과, 모든 생명이 그분의 행하심에서 비롯된 것을 배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관해 우리가,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라는 말씀을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또한 그분은 자기 백성을 위해 새 창조를 이루셨다. 즉, 그분은 죄인들의 구주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다면, 말씀이신 그분은 영생을 주실 수도 있다.
우리는 시편에서도 이 진리를 읽는다. 시편 16편 11절은 주의 앞에 생명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같은 시편 7절에서는, 진리가 성도를 훈계하며 교훈한다고 표현한다. 또한 16편 1절은, 생명은 주 안에 있는 피난처요, 그곳으로 피할 때 보호를 받는다고 말한다. 시편 119편에 따르면, 주님은 길을 비추는 빛이실 뿐 아니라, 삶의 길에 참된 의미를 주는 말씀이시다. 참으로 그분이 바로 길이시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는 성육신한 하나님이시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어떻게 당신과 나에게 그 모든 것이 되시는가 하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 그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가 바로 그 답이다. 믿음을 통해, 그분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되신다. 믿음을 통해, 그분의 진리가 우리 것이 된다. 믿음을 통해, 생명과 그 풍성함이 우리 것이 된다(요 10:10 참고). 믿음을 통해, 그분이 주관적으로 죄인에게 이 모든 것이 되신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믿음을 통해, 그분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되신다.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길과 진리의 실재성, 삶의 의미에 관해 철저히 회의적이고도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소망으로 응답한다. 객관적으로, 예수님은 성육신한 하나님이시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모든 것이 되실 수 있다. 주관적으로, 예수님은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을 통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그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신다. 이것이 절대 진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진리를 확신하며, 누릴 수 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