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기
2022년 05월 07일
언약 신학자: 하인리히 불링거
2022년 05월 24일취리히의 혁명가: 울리히 츠빙글리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존 칼빈(John Calvin)과 함께 가장 중요한 초기 종교 개혁자는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였다. 1세대 종교 개혁가인 그는 스위스 개신교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게다가 역사는 그를 최초의 개혁주의 신학자로 기억하고 있다. 후에 신학자로서 츠빙글리를 능가하는 칼빈이 나타날 것이지만 그는 츠빙글리의 넓은 어깨 위에서야 곧게 서게 될 것이다.
루터가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1484년 1월 1일에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40마일 떨어진 현대 스위스 동부의 작은 마을인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울리히(Ulrich Sr)는 소작농 출신으로 중상층 재력가가 되었고, 성공한 농민이자 목축업자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그 지역의 최고 행정 장관이 되었다. 이런 성공 때문에 그는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는 가정을 잘 다스렸다. 어린 울리히는 가정에서 확고한 독립심과 강한 애국심, 종교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학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같은 전형적인 스위스 가치관으로 교육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울리히는 일찍이 아들의 지적 능력을 알아보았다. 그는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아들을 전직 신부였던 삼촌에게 보냈다. 츠빙글리의 아버지는 그의 성공 덕분에 아들에게 더 많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1494년에 그는 10살인 울리히를 바젤(Basel)에 있는 오늘날의 고등학교와 같은 곳에서 라틴어와 변증법, 그리고 음악을 공부하게 했다. 그의 공부는 매우 빠르게 진보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1496년 아니면 1497년에 그를 베른(Berne)으로 전학시켰고 그는 유명한 인문주의자 하인리히 워플린(Heinrich Woeflin)의 지도 아래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르네상스 사상과 스콜라 철학 방법에 노출되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이 그의 재능에 주목했다. 그들은 츠빙글리를 자신들의 교단에 넣으려고 애썼지만 츠빙글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수도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비엔나 대학과 바젤 대학
1498년 츠빙글리의 아버지는 그를 비엔나 대학교(University of Vienna)로 보냈다. 비엔나 대학은 스콜라 철학이 인문주의 연구로 대체될 때 고전 학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철학, 천문학, 물리학, 고전을 공부했다. 1502년에 그는 바젤 대학(University of Basel)에 등록하여 훌륭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신학 교수인 토마스 비텐바크(Thomas Wyttenbach)의 영향을 받은 그는 가톨릭교회의 폐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더 깊은 고전 연구를 하면서 라틴어를 가르쳤고 학교에서 학사(1504)와 석사(1506) 학위를 받았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곧장 그는 소년기에 다녔던 교회인 글라루스(Glarus)에서 주임 사제의 직무를 돈을 주고 샀다. 교회 직책을 위해 왕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종교 개혁 이전에 행해졌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목회하는 데 시간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헬라어를 가르치고 교회 교부들과 옛 고전들을 공부했다. 그는 이교도 철학자들과 옛 시인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인문주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으며 그의 학문과 경건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참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로 인해 그는 에라스무스와 아주 소중한 서신 교환을 하게 되었다.
1506년부터 1516년까지 글라루스(Glarus)에서 섬기는 동안 츠빙글리는 젊은 스위스 용병을 위해 군종 신부로 두 번 섬겼다. 유럽 전역에 스위스 병사들을 고용하려는 수요가 매우 컸다. 스위스 주들에게 그것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심지어 교황도 자기 주변에 스위스 근위병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은 스위스의 많은 훌륭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군종 신부로서 츠빙글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또한 스위스인이 외국 통치자를 위해 외국 땅에서 스위스인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장례식을 수없이 집행해야 했다. 마리냐노 전투(the Battle of Marignano)(1515년)는 거의 만 명의 스위스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츠빙글리는 이 제도의 폐해를 개탄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글라루스(Glarus)에서 그가 보낸 마지막 해는 중요했다. 이 시기에 츠빙글리는 성경을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그 해에 헬라어 신약 성서를 출판했다. 그리고 츠빙글리는 그 성경을 탐독했다. 그는 바울 서신을 원어로 암기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기 1년 정도 전에 일어났다. 루터의 사상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성경을 연구한 츠빙글리는 루터가 곧 선포할 메시지와 동일한 메시지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지역의 누구도 루터에 대해 듣기 전인 1516년에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루터의 이름을 듣기도 전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적어도 2년 동안 루터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나는 분명히 루터의 가르침 없이 혼자 성경을 이해했다.”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인기 설교자
정치적 압력과 용병제를 반대하는 설교 때문에 츠빙글리는 1516년에 글라루스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1518년까지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사제로 섬겼다. 아인지델른(Einsiedeln)은 성모 마리아의 사원으로 유명한 휴양 도시였다. 스위스와 그 밖의 모든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이 사원을 방문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청중들은 츠빙글리의 설교를 들었고 그의 설교로 인해 츠빙글리의 명성과 영향력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인지델른(Einsiedeln)은 글라루스(Glarus)보다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그의 일이 좀더 줄어들었다. 덕분에 그는 성경과 교회 교부들을 연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그는 암브로스, 제롬, 크리소스톰,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와 에라스무스의 저서를 읽었고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손으로 필사했다. 그는 대중 설교자로 자신을 구별하면서 교회의 폐해, 특히 면죄부 판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더 강력한 복음주의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아직 교회가 믿는 것에 있어서 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개혁이 주로 제도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그의 가르침에서 성경보다 교회 교부를 더 의존했기에 아직 개혁을 위한 준비는 덜 되어있었다.
1518년 12월에, 츠빙글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 대성당 (Great Cathedral)에서 “시민 사제(People’s priest)” 직분을 얻었다. 이 사제직은 중요한 직책이었다. 츠빙글리는 교회 달력에 따라 설교하는 정상적인 관행을 깼다. 대신 그는 성경 전체를 차례대로 설교하겠다고 발표했다. 1519년 1월 1일 자신의 35번째 생일에 츠빙글리는 마태복음으로 일련의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 이런 강해 설교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이런 연속적인 강해 설교로 신약 전체를 설교했다. 이 야심 찬 계획은 6년이 걸렸으며 이어질 개혁 작업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519년 가을, 취리히에 전염병이 퍼졌다. 7천 명의 시민 중 2천 명이 죽었다. 츠빙글리는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도시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 자신도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회복하는 데 3개월이 걸렸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이런 개인적인 희생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 그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개혁을 소개하다
츠빙글리는 성경을 설교했다. 가령 진리가 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는 본문에서 발견한 진리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종류의 직접적인 설교에 도전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1522년에 그의 교구민 중 일부는 사순절 동안 고기를 먹는 것에 관한 교회의 규칙을 무시했다. 츠빙글리는 성경적 진리에 기초한 기독교 자유의 실천을 지지했다. 그는 그런 금지사항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 보았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많은 종교 개혁 저서 가운데 첫 작품을 저술했다. 이 저술을 통해 그의 사상이 스위스 전역에 퍼져갔다.
1522년 11월, 츠빙글리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시의회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에 중요한 개혁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1523년 1월, 그는 67개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강제 금식, 성직자 독신, 연옥, 미사, 성직자 중재와 같은 많은 중세 신앙을 거부했다. 또한, 교회의 성상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1524년 6월, 취리히시는 그의 지도에 따라 교회에서 모든 종교적 성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1524년에 츠빙글리는 또 다른 개혁 단계를 밟았다. 그는 미망인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와 결혼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츠빙글리가 루터에 대해 들어보기 전에 일어난 개혁이었으며 하나님의 독립적인 사역이었다.
1525년 취리히의 종교 개혁 운동은 상당한 견인력을 얻었다. 1525년 4월 14일 미사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취리히와 주변 지역에서 개신교 예배가 시작되었다. 츠빙글리는 단지 성경에서 배운 것만을 실행하기로 했다. 명백한 성경적 지지가 없는 것은 모두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로 성경 말씀을 읽고 그들의 언어로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뿐만 아니라 전체 회중들도 단순한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았다. 목사는 가톨릭 제단이 아닌 강의실에서 입는 것과 같은 예복을 입었다. 마리아와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과 면죄부 판매는 금지되었다.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중단되었다. 로마 교회와의 절교는 완벽했다.
재세례파: 급진적 개혁자들
츠빙글리는 또한 1523년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던 보다 급진적인 개혁 운동인 재세례파 (Anabaptists) 또는 재침례자들(Rebaptizers)로 알려진 새로운 단체와 논쟁을 벌였다. 츠빙글리는 큰 변화를 일으켰지만 이런 신자들에겐 충분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에게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주는 문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분리 문제보다 이차적인 문제였다. 재세례파들은 혁명에 가까운 교회 전체의 완전한 재건을 추구했다.
츠빙글리는 제세례파의 제안을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보았다. 교회와 사회의 즉각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재세례파의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의 전환에서 절제와 인내를 촉구했다. 그는 재세례파들이 더 연약한 신자들을 위해 종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을성 있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은 단지 츠빙글리와 급진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을 확대시킬 뿐이었다.
취리히의 치안 판사는 도시의 모든 유아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은 분노를 촉발시켰다. 재세례파들은 거센 항의로 취리히 거리를 행진하며 대응했다. 유아에게 세례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은 1525년에 서로 물을 붓거나 물에 담그는 침례를 행했다. 그들은 또한 교회 업무에 대한 시의회의 권한에 대해 츠빙글리가 확언한 것을 거부했고,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혁명적인 가르침으로 기소되었다. 일부 지도자들은 물에 잠겨 죽는 형벌을 받았다. 츠빙글리가 사형 선고에 동의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성찬 논쟁
한편, 성찬을 놓고 츠빙글리와 루터 사이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고수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 요소들 안에, 그 요소들을 통하여, 또는 그 요소들 아래에 임재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요소들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는 달랐다.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은 미사 중에 사제가 축복할 때 그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이다. 츠빙글리는 성찬은 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기념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종교 개혁 운동의 연합을 위해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 Colloquy)이 소집되었다. 두 개혁자는 마틴 부처(Martin Bucer),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오이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그리고 다른 개신교 지도자들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교회와 국가의 관계, 유아 세례,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 등 15가지 항목 중 14가지 항목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성찬에 관해서는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 루터는 “츠빙글리는 ‘매우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눈물로 나에게 제안한 그의 친교의 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동료들에게 츠빙글리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해 “나는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
이상한 역사적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일찍이 전쟁에서 용병을 사용하는 관행에 반대했던 츠빙글리가 1531년에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주 정부들은 무장했고 곧 전쟁이 발발했다. 취리히시는 남쪽에서 침입한 5개의 가톨릭 주의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군대와 함께 현장 군목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1531년 10월 11일에 갑옷을 입고 전투 도끼로 무장한 그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적군들이 그가 부상을 입고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죽였다. 그런 후에 남쪽에서 침입한 가톨릭 군대는 그의 시체를 수치스럽게 처리했다. 그들은 그의 시체를 4등분하고 그의 유해를 산산조각 내고 불태운 다음 유해를 똥과 함께 섞어 사방에 뿌렸다.
오늘날 취리히에 있는 물의 교회(the Water Church)에 가면 눈에 띄는 것은 츠빙글리의 동상이다.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서 있다. 이 동상은 강하고 단호했던 츠빙글리가 스위스 종교 개혁에 미쳤던 위대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그의 취리히 사역은 비교적 짧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츠빙글리는 진리에 대한 용기있는 태도를 통해 취리히의 교회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고, 다른 개혁자들이 따라야 할 길로 이끌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