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요약된 하나님의 섭리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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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요약된 하나님의 섭리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섭리“의 두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방법은 헤아릴 수 없다(롬 11:33).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도록 서로 격려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안에서 안식해야 한다(롬 8:28). 하나님의 방법을 “찾지 못할”(롬11:33, KJV) 때 우리는 섭리를 기억해야 한다. 비극이 닥치고, 예기치 않은 기쁨에 놀라고, 슬픔에 압도되고, 기회가 찾아오고, 상황이 우리를 궁지로 몰아가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섭리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 해결책이 하나님의 섭리 깊은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안다.

섭리의 진리가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좋고 안 좋은, 그 중간의 모든 순간)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일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과 연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한하고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우리를 이끌고 지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섭리에 대해 말해온 한 가지 이유는 인생의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었을 때 나는 내가 교수로 섬기고 있는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 캠퍼스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 마실 라떼를 사기 위해 커피숍을 지나 사무실로 돌아왔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학생 중 한 명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그는 내가 섭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유익한 예시 하나 주었다.차로 여행할 때, 그는 스마트폰에 지도를 열어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을지  항상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따라갈 수 있는 지도 없이, 친구나 가족이 한번에 한 방향씩 가르쳐 줘서 찾아가는 여행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요점은 일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의 좌표를 자세히 보여주는 지도를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청교도 존 플라벨(John Flavel)은 그의 고전 작품 『섭리의 신비(The Mystery of Providence)』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성도들의 인생의 모든 단계와 상태에서   섭리의 진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곰곰이 숙고하는 것은, 특별히 곤경의 시기에 성도가 해야 할 의무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모든 시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분의 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섭리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관해 의미 있는 숙고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섭리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핵심 교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보다 더 좋은 자료는 거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에는 교회사에서 섭리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정의 중 하나가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5장의 네 부분을 검토할 것이다. 이 부분은 성경적인 섭리 교리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제5장의 시작 부분은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에서(WCF 4를 보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WCF 3을 보라)의 실행과 연결한다. 제5장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능력, 공의와 선하심, 그리고 긍휼하심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로우며 불변하는 경륜에 따라서, 그의 가장 지혜로우며 거룩한 섭리에 의해, 가장 거대한 것으로부터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과 행동과 사물을 유지하며 지도하고 배치하며 다스리신다. (WCF 5.1)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인 “Truth We Confess” (우리가 고백하는 진리)에서 스프로울 박사는 이 단락을 “개혁주의 신학의 비할 데 없는 요약”으로 부른다. 우선, 신앙고백서는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연결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하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시고 자신의 주권적 계획에 따라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지시하신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의 사건들에 무관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고통에 놀라거나 방심하지 않는다. 은하계를 만드셨던 하나님은 당신의 머리털, 당신의 마음의 두려움, 당신의 삶의 사건, 당신의 미래의 세부사항을 알고 계신다(마 6:25-34; 10:26-33을 고려하라).

은하계를 만드셨던 하나님은 당신 마음의 두려움, 당신의 삶의 사건, 당신의 미래에 대한 세부사항을 알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계를 지키시고, 지시하시고, 처분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많은 구절로 가득 차 있다. 여기 몇몇 구절이 있다. 시편 135:6은 하나님의 섭리가 피조계의 모든 부분으로 확장된다고 가르친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잠언 15:3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상기시켜준다. 다니엘 2:21-22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 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사도행전 17:24-28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히브리서 1:3절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성경의 다양한 증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이 관찰한 것처럼, “하나님은 집을 짓고 나서 그 집을 내버려 두는 제작자가 아니라 피조물 전체라는 배를 조종하는 조종사와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섭리를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뜻에 대한 자유롭고 변치 않는 경륜”과 연결한다. 창조와 섭리의 사건들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의 전개를 나타낸다. 다른 방식으로 진술해 보자. 즉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 사역에서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수행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간결한 답변을 제공한다. 즉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뜻대로 정하신 영원한 계획인데 이로 말미암아 자기 영광을 위하여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WSC 7). 더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따라 일어난다. 시편 기자가 진술하는 것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시 104:24).

섭리의 교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정확한 목적은 우리의 눈에 가려질 수 있지만 우리에게 닥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고 현명한 계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앎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중한 진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잠언에 나오는 많은 권고 뒤에 놓여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 자신의 이해가 아닌 주님에게 둔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길을 곧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잠 3:5-6). 우리의 발걸음을 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그분의 목적은 영원히 서 있다(19:21). 아내와 내가 가족 안에서 이런 진리를 강화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서로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만족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일 하라고 요구하는 일에 충실하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도 그분의 섭리 범위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프로울 박사가 언급하곤 했던 것처럼 “독불장군식 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분의 뜻에 따라 일어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어난다. 

다음 단락에서 신앙고백서는 제1 원인과 제2 원인 사이의 어렵지만 중요한 구별을 소개한다. 신앙 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제1 원인인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과 연관되어 모든 것이 불변하고 무오하게 실현되지만, 그런데도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것들을 제2 원인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로이, 또는 우연히 일어나도록 정하셨다. (WCF 5.2)

신앙 고백서의 앞 단락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작성자들(the Westminster divines, 17세기에 신학자들을 이렇게 불렀던 것처럼)은 같은 요점을 지적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 자신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것에 의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피조물의 의지에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제2 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확립되는 방식으로 하셨다. (WCF 3.1)

이 두 진술은 전체 고백서 가운데 가장 간결하게 표현된 신학적으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가 만물에 대한 그분의 예정된 계획의 실행과 지속적인 작동의 원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물러나 계시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로봇으로 취급한다는 섭리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이신론과 운명론을 모두 거부한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이신론에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운명론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다. 이 두 가지 입장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을 발생하는 모든 것의 제 1원인 또는 주요 원인으로 선언하고 제 2 원인의 합법성을 주장함으로써 신앙 고백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 협력(concursus)을 확증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피조물의 자유로운 선택과 다른 이차적인 원인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겼던 형제들에게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말한다(창 50:20). 요셉의 형제들은 형제에게 음모를 꾸미고 그의 죽음에 대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에 대한 죄책이 있었다(창 37).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 사건들을 통해 역사하셨다(창 50:24를 보라). 마찬가지로, 출애굽기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바로의 행동을 기록할 때 우리는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를 거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예를 들어, 창 8:22). 하지만 우리는 또한 바로의 행동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결과라고 반복해서 듣는다(예를 들어, 9:12). 이런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협력임을 보여준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협력의 원리를 설명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인생을 다스렸던 더 높은 손이 있었다는 것을 식별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사를 보기만 하면 된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협력에 대한 믿음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들까지도 지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시는 방식이 아무리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넘어선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협력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자유가 유지되려면, 문제도 운명도 우연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협력만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시 104:4; 잠언 16:1; 21:1).

하나님은 만물의 주요하고 궁극적인 원인이시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신앙 고백서의 요약에 의하면 이런 진술은 자연의 법칙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목적들을 실현하기 위해 평범하고 규칙적인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만물의 제1 원인으로서 하나님과 중력이나 우리의 개인적 결정과 같은 제2원인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제2 원인을 사용한다. 제2 원인은 하나님에게 협력해야만 하는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 그분이 정확하게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수단이다.” 메이첸은 이런 요점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의 예화를 제시한다.

유리창에서 총알구멍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자연스럽게 총알이 유리를 통과함으로써  구멍이 만들어졌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총을 발사해서 총알이 유리를 통과했다. 또한 총을 든 사람이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일어났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단언한다. 그분은 일어나는 모든 것을 예정하시므로 그분은 이런 사건들의 제1 원인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유리가 깨진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지도 않을 것이다. 메이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총을 쏜 사람이 총알이 일으킨 피해에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적 다스림은 개인의 책임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신앙 고백서는 하나님이 주권적이며 우리가 책임 있는 도덕적인 피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협력의 원리를 발전시킨다. 하나님은 일어나는 모든 것의 제1 원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예정하신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이 불변하고 무오하게 실현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변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역사의 사건들이 “그것들을 제2 원인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로이, 또는 우연히” 일어나도록 명령하셨다(WCF 5 : 2).

우리는 이신론과 운명론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이신론과 운명론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작성자들이 필연적, 자유적, 우연적이라는 세 종류의 이차적인 원인을 구별하고 있는 것을 관찰해보라.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필연적 원인은 우리가 하루를 보내는데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8:22 절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고 진술한다. 한 해의 정상적인 계절은 우리가 삶의 리듬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예레미야 31:35절이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태양을 “낮의 빛”으로 주시고 달과 별을 “밤의 빛”으로 주신다. 확실히 하나님은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로 세상을 조성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낮과 밤을 경험하기 위해 해와 달과 별이 필요하다(시 90:12를 보라).

다음으로 신앙고백서는 자유로운 행위주체(free agency)를 언급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생각, 감정, 말, 행동, 행위 등을 책임지는 도덕적 행위자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을 “변화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그들에게 허락하여 범죄의 가능성 아래 두었다”(WCF 4.2; WCF 3.1; 9.1-5를 보라).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 그녀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3:6에 묘사된 행동들을 주목하라. 여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기뻐했다. 그녀는 그 나무가 줄 지혜를 원했다. 그녀는 그것을 취했고 먹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그들의 행동의 결과로 그들은 저주를 받았다(창 3장을 보라). 고대 설교자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우리가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유한한 삶을 결정하시면서도 우리의 자발적인 행동을 결코 훼손하지 않으신다(행 2:22-24를 주의 깊게 읽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무법 행위의 결합에 주목하라).

셋째,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원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인간 행위의 관점에서 볼 때, 우연적인 원인은 발생하는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는 원인이다. 우연적인 원인은 종종 “만약-그렇다면”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우리에게 몇 가지 예를 제시한다. 출애굽기 21:13 절과 신명기 19:5절에서 이스라엘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살인에 책임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피난처로 도망갈 수 있도록 한 장소를 정하셨다. 열왕기상 22:13-36절에서 선지자 미가야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자격을 입증하기 위해 아합의 죽음에 대해 경고한다. 이스라엘 왕이 전쟁에서 죽는다면, 미가야는 참된 선지자임이 증명될 것이다. 하지만 미가야가 설명하는 것처럼 아합이 평안히 돌아온다면,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신”(28절) 것이 된다. 선지자로서의 미가야의 신뢰성은 아합이 전투에서 죽어서 돌아오든지 아니면 살아서 돌아오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일차적 원인과 이차적 원인 사이의 관계를 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자연법칙과 인간의 활동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정하시고 주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차적 원인을 파괴하지 않고 확립한다. 그분의 영원한 목적은 섭리 위에서 역사 속에서 펼쳐진다. 만물의 제1 원인으로서 하나님은 정기적인 계절의 순환, 제국의 흥망성쇠, 시장의 기복, 일상의 한계가 있는 도모들, 도덕적 책임, 의사결정들, 죄인들 등을 통해  지혜롭고 목적 있게 자신의 주권적인 작정을 이루어 가신다.(예를 들어 사 10:5~19, 특히 6-7절을 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 해결책이 하나님의 섭리 깊은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5장의 다음 두 단락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첫 번째 단서는 기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통상적인 섭리에서 방편을 사용하지만, 그가 기뻐하시면 그것 없이, 초월하여, 혹은 그것을 거슬러서 자유롭게 사역하신다”(WCF 5.3).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그분의 개입에 닫혀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법칙과 같은 이차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적 통치들을 이런 수단들에 제한하실 의무는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홍해의 물을 나누거나 병든 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을 일으키도록 결정할 수도 있다. 이런 초자연적인 활동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수단의 사용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의 범위를 넓히려는 것이다.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과 기적의 질서가 상충하는 것 대신에 이 둘은 하나의 포괄적인 체계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요소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한 불변하며 영원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자연법칙, 사람의 행위, 신적인 기적 이 모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또 다른 단언은 만물에 대한 그분의 신적 주권은 그분이 죄의 조성자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이 그의 섭리에 스스로 매우 분명히 나타나 있어서, 그것은 심지어 최초의 타락, 그리고 천사와 인간의 다른 모든 죄에까지 미치되,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가장 지혜롭고 능력 있는 구속력,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한 다양한 방식의 조정과 다스림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죄악성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피조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의로워서 죄의 조성자나 인준자가 아니며 될 수도 없다. (WCF 5.4) 

이 단락의 중심적인 취지는 죄악된 행동은 하나님이 아닌 천사와 인간에게서만 진행된다는 주장에 놓여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은 모세(신 32:4), 다윗(시 5:4), 다니엘 (단 9:14), 하박국 (합 1:13), 바울 (롬. 3:3-5), 야고보(약 1:13-18), 요한(요일 1:5; 2:16)의 증거들로 호소 한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성경 본문과 여러 다른 성경 본문들을 기반으로 몇 가지 논쟁들을 이어나간다.

  •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무한히 거룩하고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순수하시고 흠과 점이 없으시다. 
  •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에서 실패하거나 결함이 있을 수 없다.
  •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법에 위배되는 모든 죄와 불의를 금지하시고 미워하시면 갚으시는 분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섭리에 관한 장은 우리를 역사라는 무대 뒤로 데려간다. 이는 절대적으로 어떤 것도 하나님의 통치권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예정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선과 삼위일체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이끄신다(엡 1:3-4).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에 눌리고 당황하고 상처받고 슬퍼하고 놀랄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명확한 고백들은 우리로 하여금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와 함께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한다. 

헤아릴 수 없는 광산 깊은 곳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솜씨로

그는 그의 빛나는 목적을 소중히 간직하신다.

그리고 그의 주권적 뜻을 행하신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권자 하나님 앞에 서서 사도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존 트위데일
존 트위데일
존 트위드데일(John W. Tweeddale) 박사는 플로리다 주 샌포드(Sandford, Fla)에 있는 종교 개혁 성경 대학(Reformation Bible College)의 학장이자 신학 교수이며 미국 장로교의 교역 장로(teaching elder)이다. 그는 존 오웬(John Owen)과 히브리서(Hebrews)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