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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섭리“의 세 번째 글입니다.

섭리 교리보다 더 실제적인 교리는 없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믿음과 경건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염려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을 나는 모든 새들을 먹이시고, 모든 아름다운 색깔의 꽃들을 입히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마 6:25-30).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돌보심을 신뢰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사람들은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간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더 많이 의식할수록, 그분에 대해 더 많이 말할 수 있다. B.B. 워필드는 이렇게 썼다. “신자는 모든 곳에서 능하신 발걸음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신자는 모든 곳에서 그분의 능하신 손길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 그분의 능하신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롬 11:36).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많지만, 모든 것에 대하여 누가 그것들을 미리 정하셨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바댜 세즈윅(Obadiah Sedgwick)은 이렇게 적었다. “세상을 창조한 이 처럼 세상을 다스리기에 적합한 이는 없다. 그분의 완전한 지혜, 거룩, 공의, 권세, 사랑 그리고 선하심은 결코 폐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바람과 파도가 험하게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배 위에 승선해 있는 어린아이처럼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그렇게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 아버지가 선장이시거든요.”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46:1-2) 주님의 교회가 이보다 더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 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자들에게 유익하다. 그중에서 다섯 가지 사항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신뢰

첫째,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우리 아버지가 성령으로 그의 아들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준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써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심을 믿으며, 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습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며,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리하실 수 있고, 신실하신 아버지이기에 그리하기를 원하십니다.”(26문답) 

하나님의 섭리와 입양에 대한 두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큰 확신으로 견고하게 세우시기 위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들의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2.1)가 고백하는 것처럼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마치 아버지가 그 자식에게 하듯이 그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고, 보호받고, 때로 훈계를 받지만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존 코튼(John Cotton)은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한데도,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것이 가벼운 일인가?” 확신하건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아들인 우리들을 위해 지금 여기,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상속자인 우리를 이후로도 영원히 채워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시며”, “하늘의 위대한 기업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험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질병, 재난 그리고 전쟁은 매일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고 간다. 악인들이 경건하고 정직한 자들을 억압하고 학대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탄과 그 무리들은 지금도 삼킬 자들을 찾아 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다니고 있다(벧전 5:8). 죄의 속임과 욕정은 우리의 마음속에 늘 격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안전하지 않다. 현실주의는 이렇게 위험한 세상에서 지헤롭고 신중하게 살아남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다만 로마서 8:28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적었다.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다양한 다루심은 그분의 특별한 섭리를 통해 결국에는 자녀들에게 선이 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왓슨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향해 품으신 매우 친밀하고 소중한 관심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렘 32:38)”

하나님의 섭리 교리는 그의 언약 백성들을 위로한다. 세즈윅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선한 사람도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부족했던 적은 없다. 좋은 것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내게 유익한 것이 부족하지는 않다. “여호와는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하나님은 살아 있는 그의 교회를 향한 특별한 섭리와 계획을 갖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에게 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이며, 그의 양, 그의 자녀, 그리고 그의 보배이기 때문이다(슥 2:8; 사 40:11, 49:15; 말 3:17).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돌보심은 완전히 은혜롭고, 부드러우며, 신비롭고, 영광스럽고, 정확하시며 또한 비범하시다.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우리 아버지가 성령으로 그의 아들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그분을 향한 예배를 뒷받침한다. 이 섭리 신앙은 사탄의 모든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가 된다(엡 6:16). 그래서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에 관한 견고한 믿음은 모든 세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다.” 강한 믿음을 가진 신자는 두려움으로 마비되거나 염려에 짓눌리기보다는 신적인 섭리라는 안전한 터 위에 굳건히 서서 견고한 순종과 복종으로 주인의 뜻을 향해 전진해 나아간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기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은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령하시고, 들으시며,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에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라는 진리를 안다(야 1:17).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하나님을 깨닫는다고 할 때에 반드시 어느 정도는 그분께 존귀를 돌리게 되기는 하지만, 모든 존귀와 찬양을 돌려야 마땅할 그런 어떤 분이 계시다는 어렴풋한 생각만으로는 모자란다. 동시에 그분이 모든 선의 근원이시라는 것과 또한 그분 이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서도 아무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납득해야만 되는 것이다…지혜와 빛 혹은 의나 능력이나 정의 혹은 순전한 진리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이 그 원인이 아니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납득해야만 한다.

기도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부르짖음이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마 6:9, 11),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실상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이시며”, 그분의 복 주심 없이 우리의 염려와 수고만으로는 우리가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철회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5답)

주님은 모든 필요와 모든 연약함, 모든 염려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시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서 우리의 양식과 음료, 건강과 의복, 가족들 안에서의 좋은 관계, 우리가 받은 소명의 성공적인 성취,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능력, 국가의 평안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벧전 5:7).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는데, 이는 기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성경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손으로부터 받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시 104:28, 요 3:27).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힘 주심 없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고, 눈도 깜박일 수 없으며,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쩌면 탁월하게 숙련된 솜씨나 다양한 경험들과 스펙으로 구성된 가장 인상적인 목록들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신 8:18). 심지어 그런 능력과 재주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종일 수고하고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해야만 하고, 오직 그분께만 모든 좋은 것들을 구해야 한다. 아, 우리가 늘 그분께 의존하는 존재들이라는 진정한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너무나 자주 사람들은 하루하루 일터로 출근하고, 식료품을 사러 가며, 약을 먹고, 값을 지불하고, 오락을 즐긴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들의 마음은 교만함 속에서 높아져 있고, 주님을 잊어버리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노라”(신 8:17). 그들의 기도 없음은 자신들의 영적 죽음의 관을 봉인하는 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심령으로 “아바, 아버지”(갈 4:6)라고 부르짖는다. 그는 성령에 의해 주입된 새로운 영적 본능을 통해 악으로부터의 모든 구원과 좋은 것을 즐김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기도하는가? 당신의 기도는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이신 분을 진정으로 바라는 기도인가? 당신은 진실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역경 속에서의 인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의 추가적인 세 가지 유익들을 조명한다.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며,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28문답)  

그러므로 세 번째 유익은 역경 속에서의 인내이다. 역경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자기중심적인 비통함 속으로 침잠하거나 낙심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상황들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거나 고통스러울 때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을 실천하여 내적인 고요함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슬픔 속에서의 경건한 고요함은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거나 감정들을 억제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을 꼭붙드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인내하는 것(“오래 참음”)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열매이다(갈 5:22). 불신자들은 그들이 바꿀 수 없는 상황들을 절망하며 포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자들은 아무리 큰 악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안에서 자신들의 유익으로 바뀔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상황을 인내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골 1:11) 이를 수 있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꺼이 십자가 지기들이 된다(눅 9:23).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안식한다. 그들은 슬픔과 시련을 통해 성숙한 거룩에 이르기까지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러한 의도에 찬성한다(잠 3:11-12, 히 12:5-11). 그들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한다(시 119:67, 71). 그들은 종종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몸부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고 계심을 신뢰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금 당장 행복을 안겨주지 않으실지라도 그분은 자신들의 신뢰와 경건한 두려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보임으로써 그분을 신뢰한다(욥 1:1, 8-11, 20-21).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 속에서 살아가며, 언젠가는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을 알기에 그분과 함께 고난받는 것도 즐거워한다(롬 8:17). 또한, 그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인내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기로 결심한다(히 12:1-2).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분이 실제로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 그래서 요하네스 반더캠프(Johannes VanderKemp)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주적인 통치자가 무엇이든 일어나도록 지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환난 속에서도 자신을 고요하게 하며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상태는 악인들의 그것보다 더 나쁘지 않겠는가?” 

신자가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는 영적인 어두움의 시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4절은 이렇게 진술한다. “참된 신자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동요되거나 약해지거나 중단될 수 있다.” 이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빛을 거두시고, 그를 경외하는 자들이라도 어두움 속에서 행하며 빛을 가지지 못하게 버려두심”으로 인함이다(사 50:10). 앤서니 버기스(Anthony Burgess)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죄의 비참함을 맛보고, 그것을 더욱 혐오하며, 겸손 가운데 자라가고, 기쁨과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다만 순종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다른 이웃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연민이 커지도록 일시적으로 신자의 기쁨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거두실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성도가 그것의 영적 유익을 분별할 수 있든 없든 관계없이,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그분의 영광과 택하신 자녀들의 선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앎으로써 안식할 수 있다. 그래서 윌리엄 거날(William Gurnall)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사라져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한다.”

친애하는 신자들이여!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항상 “당신이 원하던 방식대로” 흘러갔다고 잠시 동안만 상상해 보라.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결코 고통받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결코 역경에 직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어땠을까? 나는 적어도 내가 어떻게 됐을지는 안다. 나는 버릇없고,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오직 나 자신만 믿는 교만한 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내 육의 본성은 항상 그것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중심적인 내 자아로부터 나를 구원하시고, 점점 더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모든 고통 나에게 필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경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죄를 미워하는 사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도,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도 나와 결코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고통 속에서, 특히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후에(히 12:11),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이 우리가 경험했던 슬픔의 비참함을 훨씬 더 능가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흘린 눈물 한 방울조차도 낭비하지 않으실 것이다(시 56:8). 그래서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의 지하 저장고에 있을 때, 나는 주님의 가장 고급스로운 포도주를 찾는다.”

형통한 날에 감사하기

섭리의 네 번째 유익은,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것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지만, 형통하게 하시는 때에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비록 역경은 실제적이고, 빈번하며, 때때로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 속에 몰입된다. 그것은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딤전 4:4).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6:7), 우리는 결코 좋은 선물들이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섭리의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 또한 고갈되지 않는다(엡 5:20). 그래서 빌헬무스 아 브라켈(Wilhelmus à Brakel)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적절히 사용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이례적인 감사를 선물할 것이며, 영혼과 육체를 위해 당신이 받게 될 모든 좋은 것들의 유일한 공급자이신 주님 안에서 (당신의 세상적인 갈망과 추구를) 마치도록 당신을 가르칠 것이다.”

경건에 있어서 감사는 필수적이다. 감사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래서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경건’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뜻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이요, 자기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살피심으로 양육 받으며, 자기들의 모든 선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요, 따라서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하려 하지를 않는 법이다. 자기들의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신실하게 드리지 않는 것이다.”

역경과 형통은 모두 각각의 위험 요소들을 갖고 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 30:8-9). 역경과 형통에는 모두 의무가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야 5:13)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은 우리의 겸손을 발전시키며, 이는 기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감사의 핵심에는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을 감사하기 위해 그분이 과거에 허락하신 선물들을 반추하는 믿음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고, 매일 허락하시는 자비에 대해 감사하면서 주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여긴다(애 3:22-24).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해 거의 감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스스로 속여 그들이 그것들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곱과 같은 교훈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창 32:10). 진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속에서 고통당해 마땅하다는 것과 물 한 방울의 도움도 거절당해 마땅하다는 사실이다(눅 16:24-25). 

아버지께서 개심 수술을 받으신 후 내가 문병하러 갔을 때, 나는 아버지께서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아버지께서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신지를 여쭈었고,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간호사님이 오셔서 내 입술을 얼음 조각으로 적셔 주셨어. 나는 혀를 시원케 할 만한 물 한 방울도 얻지 못했던 지옥에 간 부자를 생각하지 않았을 수 없었단다. 나는 그 부자가 받은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지.”

당신은 얼음 조각 하나에도 진심으로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받은 가장 작은 친절에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미지의 미래를 향한 선한 기대

마지막으로, 섭리 교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 가운데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낙관주의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8문답은 섭리 교리가 “우리의 신실하신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고 진술한다. 문자적으로 보면, 화란 사람들은 이렇게 읽는다. “좋은 기대를 갖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당신은 미래에 대한 좋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 아버지의 손은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 누구도 그분의 목적과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단 4:35).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당신은 성부와 성자의 손안에 있으며, 이 세상 그 어떤 곳도 이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다(요 10:28-29).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시기에, 우리는 언젠가 영원한 기업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을 인하여 지금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바울은 섭리의 특정한 결과 안에서 영광스러워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 

섭리 교리는 또한 그 반대 또한 진실임을 암시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신다면, 누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그의 아들을 상한 심령과 믿음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한다면, 피조 세계 안에서 그 누구도 당신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막아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적대적 원수임을 고려하라.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분을 깊이 원망하고, 당신 자신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신들을 예배하는 것들 더 좋아한다. 당신은 기도 가운데 그분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을 교만하게 의지한다. 비록 당신은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기를 들이 마시고, 그분이 만드신 물을 마시지만, 감사의 마음이 없다. 당신이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당신에게서 거두실 것이며 당신을 영원히 벌하시기 위해 그의 주권적인 능력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주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그분 자신에게로 백성들을 모으고 계신다. 하나님의 가장 비범한 섭리는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갈 4:4-5). 악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 죽는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성취했다(막 10:45; 행 4:27-2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고, 이제 그리스도는 왕중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시 2:6; 110:1). 

오늘날, 하나님은 죄에서 돌이키는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 지금도 복음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롬 10:13). 당신을 위해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가 이 논문을 만나게 하셔서 당신이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 만약 당신이 아직 죄로부터 구원받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 말씀들을 그저 우연히 읽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부디 인식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이 이전에 의지해 왔던 것으로부터 돌이켜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리고 기뻐하라.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합력하여 그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회심한 사람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롬 8:28). 영광을 향한 모든 고통의 여정 속에서, 그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조엘 비키
조엘 비키
조엘 비키(Joel R. Beeke) 박사는 청교도 개혁 신학대학원의 총장이자 조직신학 및 설교학 교수이다. 또한 그는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에 소재한 헤리티지 네덜란드 개혁파 회중 교회의 목사이고 RHB(Reformation Heritage Books) 출판사의 편집 책임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칼빈주의 서론(Living for God’s Glory): An Introduction to Calvinism)』을 포함한 많은 책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