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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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섭리“의 첫 번째 글입니다.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을까요?”

불신자로부터 이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셀 수 없이도 많이 들어왔다. 이러한 질문을 들을 때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불신자들에 대해 감사하다. 세상의 일들이 목적 없이 일어난다는 누군가의 믿음은 결국 인생의 무의미함으로, 자살 또는 소시오패스 적인 행동을 야기하는 허무주의로 순식간에 변모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모든 일에 목적이 있다고 시인하는 불신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운명이 모든 것을 조정한다는 신념을 주장한다. 어떻게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운명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목적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행하려는 인격적인 누군가로부터만 온다. 만약 모든 일이 일어나는데 목적이 있다면,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모든 일에 대한 목적을 결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일에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인격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새 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땅에 떨어지지 않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마 10:29).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분이 원하시는 뜻에 따라 행하신다 (엡 1:11). 신학자들은 이를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아주 소소한 일부터 아주 중대한 일까지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역사를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역사의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목적의 성취를 위해 역사를 설계하시고, 역사가 확실히 그 목적에 이르도록 관장하신다.

우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대통령 선거, 허리케인, 또는 세계대전과 같이 커다란 사건들이 주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섭리에 관한 성경적 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역사 속 커다란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사위 굴리기 같은 아주 작은 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잠언 16장 33절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라고 가르친다. 고대 시대의 제비뽑기나 현대의 주사위 굴리기는 전적으로 무작위적인 결과를 갖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주사위 굴리기의 결과까지도 주님께서 정확하게 결정하셨다.

물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주사위의 결과를 얻기까지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가장 적당한 힘으로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너무 과한 힘을 받은 주사위는 정해진 숫자를 지나쳐 굴러간다. 반대로 너무 적은 힘이 주어진다면, 주사위는 굴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결과를 얻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의 힘을 조절하셔야 한다. 만약, 어디선가 미풍이 불면 어떻게 될까? 또는 에어컨 앞에서 던져진 주사위는 어떠한가? 바람의 영향은 비록 경미하나 결과에 분명 한몫을 한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결과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바람까지도 조절하신다. 그런데, 공기의 움직임은 방의 온도와도 관련이 있다. 방의 온도는 공기 분자와 관련이 있고, 공기 분자는 분자 내의 원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엄밀히 말해서, 원자 구성 입자로 공기 분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자들이 정확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딱 맞는 온도에 맞춰져야 하나님께서 정하신 주사위의 숫자가 나오기 위한 필수 조건들이 충족된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굉장히 단순화 한 것이다. 입자보다 더 작은 아래의 단위로 내려간다면, 설명은 보다 더 복잡해 질 것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가르치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 교리를 어느 정도는 믿고 있다.

R. C. 스프로울 박사가 우리에게 종종 상기시켜 주었듯이, 모든 창조 세계에는 주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지도하심 밖에서 활동하는 “독불장군 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만약 가장 작은 어떤 것이 이 주권적인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면, 이어지는 연쇄적인 효과들이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 R.C 스프로울 박사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듯이 ‘우연’은 없다. 

일상 속의 섭리

‘우연은 없다’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일상의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극적으로 재구성된다. 현실을 직시해보자. 세상의 관점에서 우리 대부분은 세상에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영속적인 영향을 끼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 뒤에 금새 잊혀질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거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다루는 국가 정세에는 관여하시지만, 우리 개개인은 깊이 주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기저귀를 바꾸는 일, 십 대 청소년 자녀를 지도하는 일, 주택 담보 대출을 갚기 위한 고된 근무 시간, 이웃과의 대화, 주일 성수에 대한 고민, 저녁 시간에 갖는 휴식, 어린 자녀와 똑같은 게임으로 끝없이 놀아주는 일, 시험을 앞두고 하는 벼락치기 공부 등과 같은 일들이 하나님의 관심사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 진리는 이와 다르게 답을 한다. 첫째, 섭리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명령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히브리서 1장 2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만물을 붙드신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신다 (느 9장 6절). 나는 자녀들에게 최근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주님께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은 그 즉시로 사라져 버린다고 말이다. 모든 순간 가운데,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보존하심을 전적으로 의존한다. 우주란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섭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무언가가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극히 평범하게 여기는 일도 하나님께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창조주는 아주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그분의 시간과 능력을 헛되이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것에 가치가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가 내리는 매 순간의 결정까지도 포함된다. 여기서의 가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양산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일하시고, 그분의 주권적인 계획 속에서 어떻게 모든 것들을 한데 엮으시는지, 이 안에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사 43:6-7; 롬 8:28).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렇게 상술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와 보존은 상대적으로 삶의 작은 부분들에서 나타난다. 저녁 식사로 생선 대신 닭을 먹고, 정원에 심을 꽃의 종류를 정하고, 야구보다 축구를 선호하고, 고속도로 대신 경치 좋은 국도 위를 운전하고, 미용사에게 앞머리를 1센티 혹은 2센티 자를지 알려주고, 어린 딸을 축구 교실과 발레 학원 중 어디에 등록할지 결정하는 일 등, 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통치하시고 이끄신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로 우리가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생선 대신 닭을 골랐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잘못되는 일은 없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닭을 고르든 생선을 고르든, 이러한 결정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닭을 먹든 생선을 먹든, 이는 근본적으로 죄나 의에 관련된 사안이 아니다. 그렇지만 엇뜻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는 일에 대해 내리는 우리의 결정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상의 모든 일을 다스리셔야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가 아주 특별한 일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섭리란 우리가 겪는 매일의 삶 속에서의 지극한 실상이다. 성경은 이신론의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신론의 개념에서의 신은 그의 피조물의 관심도 없고 관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이야기한다 (렘 23:23-24). 하나님께서 어디서나 그분의 창조 세계에 함께 하신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의 모든 사건과 결정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분의 피조물과는 구별되신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은 일부가 아닌 전체를, “그의 뜻의 결정대로” 유지하시고 다스리신다 (엡 1:11).

특별 섭리

우리의 소소한 결정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것은 아니라고 이미 설명했다. 그렇다면, 더욱 크고 중대한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들 역시도 주님의 계획을 훼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아주 특별하다고 여기는 일에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세계사의 흐름에 보다 뚜렷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 사고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일한다 나타난다. 주님의 섭리가 일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기에, 아주 특별한 일들도 그분의 섭리 아래 있다고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다.

다니엘서 2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신다”고 말한다. 세계의 통치자들만큼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한 통치자들의 흥망성쇠는 아주 특별한 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의 흥망성쇠는 인류의 역사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위해 정확하게 일어난다. 그렇기에 기원전 538년에 고레스가 바사 왕국의 왕좌의 오른 사건은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의 핵심을 잘 나타내준다.

먼저는 바사가 세상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기 오래전, 대략 200여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레스가 태어나기도 전, 유다의 바벨론 유수가 시작되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의 집권과 통치, 그리고 유다의 귀향에 대하여 예언했다 (사 45:1-13).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고레스가 바사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건과 결정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유다 민족이 귀환할 수 있었던 기틀이 마련되었다. 첫 번째로, 유다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바벨론이 이사야 당시의 최대 강국이었던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켜야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앗수르의 통치권자들의 잘못된 판단이 있어야 했고, 바벨론 군대가 전투에서 앗수르보다 잘 싸울 수 있어야 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바벨론은 뛰어난 전략가를 보유했을 것이고, 반대로 앗수르의 왕은 형편 없는 전략가를 두거나 왕 스스로가 패배의 전략으로 군대를 이끌었어야 했다. 정확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바벨론의 전략가는 제대로 된 교육과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러한 수준의 교육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야 한다. 또한 그들의 부모는 결혼에 대해 신중한 결정을 내리고 가정을 이뤘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실력 없는 전략가가 앗수르에서 나오게 된 비슷한 일련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고레스가 왕이 되기 전에, 그가 먼저는 세상에 태어나야 했다. 고레스의 부모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어야 한다. 두 사람의 양가 가족들이 혼인을 허락하는 과정도 있었을 것이다. 고레스의 부모는 혼인 적령기가 될 때까지 사고나 질병 등으로 죽음을 맞지 않고 성장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레스의 조부모들이 고레스의 부모가 성장하는 동안 바른 결정을 내려가며 그들을 잘 보살폈어야 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고레스의 증조부들이 조부모들을 잘 보살폈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 과정은 윗대 선조로 계속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굉장히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핵심은 고레스 왕이 왕좌에 오르고 유대인들이 귀환하는 등의 사건들이 수없이 많은 소소한 디테일들(앞에서 살펴본 부모의 결정들이나 개인사들)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정하신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심지어, 고레스가 왕권을 손에 쥘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건강한 면역 체계와 같은 유전학까지도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중병으로 발전될 유전적 결함이나 아주 작은 문제가 어느 시점에서라도 생겼다면, 모든 것은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셨고,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

모든 결정과 행동은 폭포 효과를 가져온다. 아주 특별한 사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역사를 역추적해보아라. 무수히 많은 사람이 내린 수백만의 작은 결정들이 종합되어 적재적소에서 적임자가 등장하며, 큰 사건이 초래되는 결정이 내려진다. 예언되었던 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구세주(사 11:1-10)가 나시기까지 다윗 가문은 구세주의 탄생까지 존재해야만 됐다. 다윗 가문 내외적으로 내려진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들이 잘 이바지 됐어야만 다윗 혈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 룻기에도 그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우연처럼 보이는 여러 사건이 다윗의 선조인 보아스와 룻의 결혼으로 이어졌음을 기억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일상의 모든 일을 다스리셔야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가 아주 특별한 사건들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목적에 따라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목적에 따라 일어나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의 섭리, 우리를 통한 섭리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이렇다. 닭과 생선 사이에서 내리는 결정이 일반적으로 도덕적 결정이나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결정이 궁극적으로는 절대 하찮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닭과 생선 중에 선택한 결정이 미래의 후손에게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도 있다. 미래의 후손은 해산물 음식점 대신에 커피 전문점을 가고, 그곳에서 커피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또 그녀와 결혼을 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영향력 있는 복음 사역자나 재판관, 대통령이 되어 세계사를 빚어낼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선조가 생선 대신에 닭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 지도자의 부모가 커피 전문점에서 만나지 못한 경우를 상상해 보아라.

우리가 이와 함께 생각해볼 바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리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마치 위대한 애견 조련사로 모든 애견들의 목줄을 붙잡고 계시지 않다. 우리의 결정이 실제로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동기는 전혀 의미가 없으며, 우리가 역사의 추이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결정, 행동, 동기를 통해 그 안에서 일하신다. 여전히 우리 자신의 결정과 행동, 동기이지만 이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신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의 결정과 행동, 동기는 하나님의 결정과 행동, 동기에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바를 이루기 위해 인간과 신, 각각의 배우가 가진 본성을 따라 그 협력은 이루어진다. 신학자들은 이를 협력의 교리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성경 속의 예화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화 중의 하나로 요셉의 인생을 꼽을 수 있다. 특별히 요셉이 자신의 경험을 요약해주는 내용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자신의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려 간 이후, 이집트에서의 학대를 견디고 파라오의 총애를 받아 총리가 되어 가족들과 상봉한 요셉이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했다.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악한 의도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행동을 이룬 동기이자 목적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계획이 있으셨다. 하나님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고 파라오의 궁을 섬기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하실 뿐 아니라, 특별히 택함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완성하고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 안에서 요셉의 형제들의 악한 의도와 행위가 용납되었다. 그래야만 요셉이 먼저 이집트에 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악한 의도를 갖고 행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악을 도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과 형제들 사이의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와 행위는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기 위해 협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란 크고 작은 일들이나 선하고 악한 일, 모든 것이 목적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프로울 박사는 하나님의 섭리 중 협력이라는 요소를 가르칠 때면 종종 욥기 1장을 살펴보곤 했다. 욥기 1장에서 사탄은 욥을 파멸시키고 싶었다. 하나님은 그런 사탄을 허락하셨고, 갈대아 사람들은 욥의 낙타들을 약탈했다. 모든 일이 일어나고 욥은 커다란 손실을 입고 만다. 그러나 성경 속의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각기 다른 일을 수행했다. 사탄은 주님의 신실한 종인 욥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원했다. 그러기 위해 욥을 자극하려는 시도를 했다. 주님은 욥을 그의 신실한 종으로 입증하기 원하셨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욥에 대한 사탄의 대적을 허락하셨다. 갈대아인들은 하나님과 사탄이 나눈 대화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부유한 욥을 보고 그가 가진 재산을 탐하여 그의 낙타들을 빼앗았다. 이러한 모든 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사탄이 욥의 신의를 깨고 싶지 않았거나, 하나님이 사탄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거나, 또는 갈대아인들이 욥의 재산을 탐하지 않았다면 욥은 경제적 손실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협력하여 욥에게 고난을 가져다준다. 물론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에서도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다.

협력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성경의 예화는 아마도 우리 구세주의 십자가 사건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사건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동기와 행동들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지금부터 살펴볼 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인격과 관련된 특정한 사역들을 구원의 작업 속에서 강조하면서도, 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기에 서로의 사역에 상호적으로 관여하고 계신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한다.) 유다는 금전적 동기에 의해 예수님을 배반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과 예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칭송을 기뻐하지 않았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유대인 봉기로 발전될 수 있는 어떠한 분쟁의 싹도 미리 제거하길 원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식되어 사단의 왕국이 공격받는 걸 막고 싶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고자 하셨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구원하시려는 약속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셨다. 성령 하나님은 효과적인 속죄가 성취되고 구세주가 영광 받으시도록 십자가의 예수님을 지탱해주셨다 (사 53; 마 26:3–5, 14–16; 27:24–26; 요 3:16; 11:45–49; 롬 8:32; 히 9:14; 계 12:4). 구속사의 가장 위대한 사역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향해 함께 일했다. 각기 다른 동기와 행위가 있었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결과와 목적이 결실을 보도록 협력했다. 하나님은 악행을 저지르시거나, 각 인물의 의지를 훼손하지 않으시면서 이 모든 것을 통치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3).”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란 크고 작은 일들이나 선하고 악한 일, 모든 것이 목적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좋은 이유를 위함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일을 그의 완전하신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기 때문이다(엡 1:11). 다음 글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성경적 가르침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에서부터 아주 특별한 사건들까지 모두에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는 그분의 피조물들이 하는 일 안에서 또 그 일을 통해서 나타난다. 우리가 분별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목적을 두시며,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권자가 되신다. 더욱이,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로버트 로스웰
로버트 로스웰
로버트 로스웰(Robert Rothwell)은 테이블톡의 부편집자이며,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선임 작가이자, 플리리다 주 샌포드에 있는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의 상주 겸임교수이다. 그는 2021년 테이블톡 매거진의 매일 성경공부 고린도전, 후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