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상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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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상 왕국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천국 생활 매뉴얼: 산상수훈”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마태복음 7:1-12절은, ‘왕국 생활을 위한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마 5-7장)의 일부로, 실제로 예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전하신 왕국에 관한 가르침의 일부인 듯하다(마 4:17, 23 참조).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새로운 창조 세계다. 첫 번째 창조인 세상 왕국(계 11:15)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새 창조 왕국의 시민권이라는 은혜로운 선물을 받는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동안 고난을 받아야 한다(마 5:3, 10-12 ; 벧전 1:6 ; 5:10참조).

예수님은 천국의 생명을 상속하는 자들이 옛 창조의 영광 아래서 사는 것과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관점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명확히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세상 속에 있어서, 잠시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는 동안, 지상 왕국에서 소금과 빛의 사자로서 행동해야 한다(요 15:16~19 ; 고후 4:16~5:5, 17 ; 빌 3:19~21). 우리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며(롬 8:1 ; 약 1:2~4), 이 시대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증거는, 잃어버린 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의 일부이다(행 17:30~31 ; 롬 2:4 ; 베드로후서 3:9~10).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7:1~12절은 1~5절, 6절, 7~11절, 12절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섹션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이제 각각의 섹션을 순서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7:1~5절은(눅 6:41~42 참고) 그 자체로 해석하기가 비교적 쉽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의 외식적인 엄격함에 대한 엄중하면서도 해학적인 경고이다. 주님의 책망으로 말씀의 엄격함은 더 강조된다. “외식하는 자여”(마 7:5 ; 지혜와 주님의 책망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잠 3:11 참조)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외부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며(예: 마 6:2, 5, 16; 15:7; 22:18),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신다(마 23:13, 15, 23, 25, 27; 24:51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외식하는 자를 향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비난이 의외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과 태도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 해 볼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7:1-5절의 해학은 위선자의 눈에 들어간 “통나무”(혹은 ‘지붕 들보’)와 형제의 눈에 들어간 “티끌”(혹은 ‘톱밥 조각’)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 경우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과도함”를 주목하였다. 예수님의 목적은 청중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 경우에는 과도하게 비판적인 위선자의 어리석음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다. 궁극적으로, 외식은 천국 시민들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없으며, 특히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다(문맥상 롬 2:23 참조). 오히려 우리의 삶은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신성한 작품으로서 우리의 변화된 본성을 따라야 한다(롬 6:4 ; 엡 2:10). 마태복음 7:1-5절에서 추론 되는 윤리는 모두에게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왕을 향한 순종 가운데 나타나는 순수한 이타적 사랑과 자비이다(예: 마 11:28-29).

마태복음 7: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개를 언급하시며 은유를 사용하셨는데, 고대 유대 문화에서 개는 근본적으로 천한 동물이었다(예: 출 22:31 ; 왕하 8:13 ; 계 22:15). 이는 어리석은 자(잠 26:11)나 회중 가운데 있는 거짓 선생(빌 3:2 ; 벧후 2:1-22)에 비유되기도 했다. 돼지 역시 부정한 짐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벧후 2:22). 탕자의 비유에서 그가 돼지를 치면서 돼지들도 먹지 않는 사료를 먹고 싶어할 만큼 몰락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그 좋은 예이다(눅 15:15-16). 진주는 고대 세계에서 특히 귀했다(예: 마 13:46 ; 계 21:21). 하지만 진주는 돼지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귀한 물건을 던져주어도 전혀 관심이 없는 이 개들은, 식탁 밑에서 남은 음식을 먹는 집 개가 아니라(마 15:27) 무리 지어 마을을 돌아다니는 야생 개들이었다(시 59:6, 14).

그렇다면, 기억에 남는 마태복음 7:6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좋은 답변은 이를 1-5절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위선적으로 ‘형제’를 판단하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셨다. 이는 다른 사람을 교회의 동료 회원, 형제나 자매로 식별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권고와 책망과 함께라도 서로 도울 의무를 행할 것을 기대하시며 마무리하신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신약 성경의 많은 곳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지닌 이러한 책임을 확증한다(예: 마 18:15-17 ; 갈 6:1 ; 살전 5:14 ; 히 3:13). 대표적인 예로는 안디옥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다(갈 2:11-14).

그러므로 마태복음 7: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에서 형제 자매를 훈계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진행하고, 누구에게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6절의 비유가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 다른 사람들을 꾸짖는 것은 거의 실패한다고 볼 수 있다(유다서 참조). 그러나 형제 자매를 회복시키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며 “많은 죄를 덮을 것”이다(약 5:19-20).

또한 우리는 다음 구절(마 7:7-11)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주변 진술과 연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하면 아버지의 선하심으로 인해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확신하며 시작하고 있다. 여기의 “찾는 것”(7절)은, 마태복음 6: 25-34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심으로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7-11절은 어떻게 맥락과 연결되는가? 그 답은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눅 11:9-13)에 나와 있는데, 이 구절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과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서 아버지께서는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공급하신다(마 7:11). 반면 누가복음 11:13절에서 예수님은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선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령을 통해 신앙을 키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 또한 다가오는 시대에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제 마태복음 7: 7-11절과 그 문맥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형제자매의 회복과 회개가 필요할 때 서로에게 관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마 7:5-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요일 5:16).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중보가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허락되기도 한다(예:마 18:15 ; 고전 7:16 ; 벧전 3:1). 성령을 통한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7: 7-11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 구절의 마지막 절(마 7:12)도 문맥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표현된 황금률은 특히 1~5절과 이 구절에서 이어지는 다른 구절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눈에 큰 나무 조각이 박힌 비판자가 너무 엄격한 나머지 자기 눈에서 톱밥을 제거하려고 할 때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비판자에게,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우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여러분의 행동은 지혜와 통찰력으로 자격을 갖추고(마 7:6), 특히 그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라(마 7:7-11). 누가 형제와 자매들의 기도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행함으로써 성경의 가르침(“율법과 선지서”)을 성취해야 한다(레 19:18 ; 마 19:19; 22:37-40).

마태복음 7: 1-11절의 초점이 하나님 나라의 동료 시민들을 대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면, 12절에서는 이 세상 사람들(“다른 사람들”; 눅 10:29-37 참조)을 대하는 우리의 행동으로 까지 확대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구절에서 더욱 집중하게 하셨던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신다. 즉, 우리는 천국의 사자들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사실이다. 왕국의 대사관이 없다면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눈 먼 채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행 17:27 참조). 그러나 우리가 교회 안팎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의 역사를 분명하게 증거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요한복음의 이 부분은 마태복음 7: 1-12절에 나타난 우리 왕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S.M. 바우
S.M. 바우
S.M. 바우 박사(Baugh)는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에 있는 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의 신약학 명예교수이자 정통 장로 교회(OPC)의 목사이다. 그는 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