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
2024년 07월 20일
작은 자와 작은 일들
2024년 07월 25일교회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아홉 번째 글입니다.
모더니스트의 주장과는 달리 J.G. 메이첸이 옹호한 역사적 기독교는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제5장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사회적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그리고 구원이 사회에 가져오는 결과를 반영하면서 5장을 마무리했는데, 복음은 가족, 지역 사회, 직장, 정부를 포함한 인간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모든 기관 중 제일 중요한 기관은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메이첸이 교회에 대한 높은 견해의 회복을 촉구하는 이 마지막 장은 실제로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의 현재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이 책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마지막 장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스럽다.
메이첸은 먼저 “인류의 보편적인 형제애”를 전제로 하는 피상적인 공동체에 이의를 제기한다. 메이첸이 이미 보여주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의 진정한 친교를 위해서 명확한 교리적 경계가 필요한 이유는, 자유주의가 기독교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가장 큰 위협은 외부의 적들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다. 이는 교회 내에 철저히 반기독교적인 신앙과 실천이 존재하는 데서 비롯된다.” 결과적으로 “교회 내의 두 당파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필요이다.” 메이첸의 “직설적”이고 “공명정대한” 호소는 토론을 면밀히 관찰한 세속 언론인 멘켄(H.L. Mencken)으로 부터 “우호적 중립”이라는 호칭을 얻게 했다.
이 분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기독교와 자유주의』가 출판된 당시 두 당파의 입장에서 가장 유력해 보였던 전망은 소수의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이첸은 이렇게 정직히 조치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메이첸은 보수주의자들이 강제로 교회를 떠나게 되는 상황도 예측했다. 10여 년이 지난 후 이 상황은 실제가 되었다. 메이첸은 모더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교회 이사회에 “불충”한다는 중대한 범죄로 제명당했다. 목회적 소명에 대한 신실함이 이 십자가를 지도록 만든 것이다.
메이첸은 교회를 분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하는 과정 가운데 있던 것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메이첸이 교회의 연합을 위해 추구한 지속 가능한 방법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한 반대 호소는 메이첸이 제시한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교회의 평화주의는 지속적인 평화나 연합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동일한 조직 내에서 근본적인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강제적인 연합만큼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교리적 편차를 용납하는 것은 “단순한 부정직”이다.
메이첸이 예측한 또 다른 상황이 있었다. 사역자들이 회중의 정통성이나 장로회의 건전함으로 만족하며 기능적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이첸은 이것이 단순히 장로교의 선택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장로교인들은 교회의 공동 증인으로 참여해야 한다. 모든 설교 강단의 목소리는 교회 전체의 목소리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모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메이첸의 교회론은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와 가짜 교제를 구별하려고 노력했다. 사색의 친교가 없는 곳에는 삶의 친교도 이루어질 수 없다.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매우 광범위한 교회주의를 낳았고, 이는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 강단에 서도록 허용해 주었다.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 표현된 교리에 대해 “전심으로 동의”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제를 낳는다.
이 동의를 확립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교회는 다음 네 가지 과제를 부지런히 추진해야 한다. 첫째, 믿음을 위해 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직분자들의 자격을 높게 유지하고 안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셋째, 사역 장로들은 강단의 설교를 지켜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신도석에 만연해 있는 무지를 해결하기 위해 교리 교육과 제자 훈련을 회복해야 한다. 한마디로 교회는 교리를 지켜야 한다. 이를 전파하고 옹호하는 일에 있어 전투적이고 배타적으로 될지라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메이첸은 교회를 분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하는 과정 가운데 있던 것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메이첸이 교회의 연합을 위해 추구한 지속 가능한 방법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메이첸의 정당성은 입증되었다. 자유주의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주류 개신교는 그 의미와 신도들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어떠한가? 전투적으로 세상에 증인이 되어왔는가? 종교적 경험에 대한 강조와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미국 복음주의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복음주의는 신앙고백에 대한 헌신에 관대하고, 교리 교육은 사라졌으며, 교회 권징은 꺼려한다.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우선순위로서 교회에 헌신하고 매주 출석하는 일이 감소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취향과 선호에 따라 교회를 이동하는 것이 자유롭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진정한 종교를 추구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일도 허다하다. 지금 시대의 교회들은 이런 방식들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시대의 세속성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종교적인 소비자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메이첸은 진정성에 목을 매는 세대에 맞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금의 시대나 모든 다른 시대에도 참 교회의 표식을 나타내는 교회의 진정성에 대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말씀의 선포, 순수한 성례전, 교회 권징의 행사이다.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마지막 장을 주의 깊게 연구하지 않는 이들은 이 저서의 지속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교회는 세속에 굴복한 것이다. 메이첸은 교회의 소명이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서에 요약되어 있는 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세속을 버리고 천국 본향을 향해 행진하는 순례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며, 소망을 주는 장소가 된다. 메이첸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싸움을 피할 피난처가 없는가? 인생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재충전 장소가 없는가?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나라와 민족을 나누는 일, 자존심, 전쟁에 대한 열정, 산업 분쟁 문제들은 잠시 잊어버리고 십자가 아래서 넘치는 감사로 연합할 수 있는 곳은 없는가? 그런 곳이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집, 곧 천국의 문이다. 그 집의 문지방 아래에는 지친 세상을 소생시킬 강물이 흐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