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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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소금과 빛”의 열여덟 번째 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지상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하늘의 권능을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신뢰할 수 있다. “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말씀에 계시되는 모든 것을 참되다고 믿으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르게 행동하고… 명령에는 순종하고 경고에는 두려워 떨고 현세와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WCF 14.2).

베드로전서 4:12-19절은 권면서(paraenesis)의 수사적 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겪게 될 극심한 고난 때문에 노선을 바꾸지 말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이런 강력한 권면은 신자들이 성숙한 성도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준다. 베드로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고난받을 것을 예상하고 불같은 시련에 맞서고(12절),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13절),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강한 입장 때문에 오는 비방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자 영광의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증거로 해석해야 한다.(14절) 또한 모든 죄와 특히 살인, 강도, 간음과 같은 모든 잠재적 죄를 죽이고(15절), 믿음을 위해 고난받으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16절),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하고 책망스러운 심판이 교회로부터 시작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17절). 존 칼빈이 언급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단지 천 번의 죽음을 피한 후에만 천국에 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베드로가 “겨우 구원을 받으면”이라고 부르는 것- 제네바에서의 개혁활동이 하루에 천 번 죽는 것이나 다른 방법으로 100번 이상 죽는 것보다 어려웠다는 의미-옮긴이). 이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고난 속에서도 계속해서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신다(19절). 베드로전서 4:12-19절은 신실하고 눈에 보이는 교회 언약의 지체이며, 교회와 서로에게 속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1-11절). 이 구절은 “은혜로우신 아버지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기를 원하시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한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은 고독한 고난에서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세우고, 교회를 정화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사용하신다. 베드로는 고난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지만, 믿음을 망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시련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여”(빌 3:10)할 수 있다. 그리고 시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우리 신앙의 중심인가를 드러낸다. 존 오웬은 다른 모든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리적 우선순위라고 부른다. 영적이며, 깨뜨릴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영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스러운 자녀인 우리에게 섭리적으로 주신 시련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미래를 구속하시고 과거를 치유하신다는 것과, 풍파가 있든 없든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고난을 겪는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고 명령한다. 우리는 피학대 성애자이거나 니체의 초인(Ubermensch)(특별한 재능으로 법 위에 군림하며 인생의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같은 사람들이라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고난을 겪는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인내하신 것에 경탄한다. 토마스 케이스(Thomas Case)의 말을 빌려 우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십자가의 조각이 이렇게 무겁다면 십자가 자체는 무엇이었는가? 내 육체의 고통이 그렇게 쓰라린 것이라면 주님께서 그 영혼에 받으신 고통은 무엇이었는가? 사람의 진노가 그렇게 날카롭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떠하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신 십자가의 남은 부분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자의 분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몫이다(시 16:5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시자 우리의 본이시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유산과 정체성은 십자가에 반영되어 드러날 것이다.

개혁은 항상 교회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이유로 베드로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벧전 4:17).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온 나라에 재앙이 시작된다고 말한다(사 10:12, 렘 25:29, 겔 4:6).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 심판은 믿음의 가정에서 시작되지만,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진노를 부으심으로 끝난다. 칼빈은 우리가 도살당하기 위해 살찌운 송아지처럼 내일의 심판을 짊어지고 오늘의 안락함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켜 준다. 극심한 고난은 죄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회개의 삶은 우리의 영혼이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베드로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재물, 힘, 왕들만 신뢰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묘사한다. 청교도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은 “재물은 불확실하고, 만족스럽지 않으며, 불충분하고, 제한적이며, 기만적이다”라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만족스러우며, 모든 것이 충분하시고, 신실하시다. 힘은 헛된 것이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왕들은 떨고 있는 상한 갈대이나 하나님은 만세의 반석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신실하게 지켜주시고 모든 시련을 통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대의”라는 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베드로의 체크 리스트 스타일은 우리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게 한다. 우리는 신실한 교회의 언약 회원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고난 가운데서 비방을 당하거나 더 나쁜 일을 견디며 계속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연약하고 방황하는 신앙을 위한 이 강력한 약은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신실하게 준비해 나갈 것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로사리아 버터필드
로사리아 버터필드
로사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 박사는 작가, 연사, 목회자의 아내, 홈스쿨 엄마이자 시라큐스 대학교(Syracuse University)의 전 영어 및 여성학 교수였다. 그녀는 『The Gospel Comes with a House Key』를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