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중요한 시기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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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요한 시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결정적 시대: 4세기 교회사”의 두 번째 글입니다.

4세기는, 교회가 생겨난 이후 1,500년간의 시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 미래의 교회를 위한  방향을 결정하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4세기는 두 가지 중요한 전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박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도록 부름 받았다(롬 12:18 참조). 하지만 사회에 기여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교회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핍박은 계속되었다. 황제나 독재자는 기독교인들이 최고의 시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비극적이게도 통치자들은 종종 전체주의가 은혜와 그 은혜가 주는 영향보다 낫다고 보았다.

4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3)는 황제로서 10년 반 동안 로마를 다스리고 있었다.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군대를 거쳐 284년에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조직가이자 행정가였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재의 불안정한 제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개혁가였다. 그가 통치하는 대부분의 기간,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적 평화를 누렸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이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체주의적 통치를 통해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모든 시민에게 ‘우리의 가장 신성한 주(sacratissimus Dominus noster)’로 그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헌신을 요구했다. 이 원대한 계획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진압되었다.

303년에는 박해가 일어나 교회가 파괴되었다. 기독교가 책에 근거하고 있는 신앙임을 깨달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의 책, 특히 성경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런 후에 제국의 모든 시민이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포고령에 교회 지도자들과 일반 기독교인들이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굳건히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퇴위하고 은퇴하여 현재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Split, Croatia)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다. 하지만 박해는 계속되었다.

때때로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진실과 과장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순교에 관한 이야기가 과장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아마 이런 과장은 위협을 받아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대조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들 가운 가운데 일부는 불태워진 성경 사본을 넘겨주었다. 이것은 교회에, 실패한 기독교인, 배교자들이라는 새로운 문제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평안한 시기에 그들이 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13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년 전 니코메디아 칙령(311)으로 박해가 종식되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구세주를 믿고 따른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은 십자가에 의해 특징 지워질 것이다. 

생명의 길은 죽음의 길이다.

유연함 숭배(The Cult of Softness)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견뎌낸 고난은 두 번째 추세를 두드러지게 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추종자라고 공언했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누리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는 생각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신비가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큰 도전을 제기하는 것은 이성을 최대한으로 확장시키는 계시가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구세주를 믿고 따른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은 십자가에 의해 특징 지워질 것이다. 생명의 길은 죽음의 길이다.

우리가 고통에서 뒷걸음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따라서 4세기 초에 있었던 그런 반응이 놀랄 일은 아니다. 

“어느새 편한 것들을 즐기게 되고(subtle love of softening things)”에 대한 한 가지 반응으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거부하고, 사회를 버리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분리되어 은둔자로 살려고 했다. 특히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 운동은 완전히 고독한 삶을 살기 위해 광야로 나간 사람들이(그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시험을 이기기 위해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구하면서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광야는 마귀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우스(Antony)

이런 은둔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이집트의 코마에서 태어난 안토니우스(251~356)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그는 모든 것을 팔고 자신을 따르라는 부자 청년 관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285년경부터 305년까지 금욕적인 사막 생활에 헌신했다. 그때 그는 수도사들의 모임을 조직하고 다시 광야로 돌아갔다. 특별히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했던)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유명해져 널리 존경받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박해와 수도원주의(monasticism)이라는 이 두 가지 영향은 기독교인의 증거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둠이 빛을 이기거나 빛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세상은 어두워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을 제거한다면 도덕적, 영적 부패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놀라운 금욕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막의 수도사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 외에도 4세기에 일어난 세 가지 중요한 사건에 주목해야 한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첫 번째는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4세기 기독교 작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지배를 위해 싸웠을 때 그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the Battle of Milvian Bridge) 직전에 놀라운 꿈을 꾸었다. 그 결과 그는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가지고 싸웠다. 그런데 이것은 유명한 카이로 합일문자(chi-rho monogram, 그리스도라는 칭호의 첫 번째 두 글자에서 나온 것)가 되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자신의 승리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돌렸다. 즉시 그는 기독교인에 대한 형법을 완화하기 시작했고 결국 기독교를 위대한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즉 박해가 끝이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물리적 방해 없이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는 좋은 소식이었지만 처음으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는 의미에서는 나쁜 소식이었다. 로마 제국의 시민들은 이제 스스로를 사실상의 기독교인으로 간주하곤 했다. 자연적 출생과 영적 출생(거듭남) 사이의 성경적 구분이 사라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이런 치명적인 실수는 장기적으로 이 세상 시민과 오는 세상의 시민 사이의 차이를 최소화함으로써 교회에 방해가 되었다. 그 이후로 서구의 교회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충성은 명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니케아(Nicaea)

4세기의 두 번째 주요 사건은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aea)였다. 이 공의회는 공식적으로(최종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교회의 격렬한 논쟁을 해결했다.

이 논쟁의 원인은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에 답한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아리우스(Arius)라는 장로(목사)의 가르침을 통해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교회가 고백했던 것처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begotten of the Father)”이라면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라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리우스를 반대했다. 그는 아들 자신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킬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무한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인 경우에만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 있다. 게다가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함축적으로 성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독교인은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성부, 성자, 성령의 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최초의 기독교 의식이 타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성자의 완전한 신성이 필요했다.

그의 단호한 충성심으로 인해 아타나시우스(그의 얼굴의 혈색과 작은 키 때문에 “검은 난쟁이”라는 별명이 붙음)는 다섯 번 이상 추방되었다. 하지만 가령 온 세상이 그를 반대하더라도 그는 구주의 완전한 신성을 옹호하기로 결심했다(“세상에 반대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gainst the world)”라는 표현이 여기서 유래했다).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에서 소집한 공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에 대해 신약성경에 근거해 가졌던 아타나시우스의 확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4세기의 세 번째 주요 사건은 한 개인의 삶에서 일어났다. 그의 저작은 그를 사도 시대 이후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만들었다. 물론 그 사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이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지금의 알제리의 안나바(Annaba))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분적으로 자신의 회심을 그녀의 기도로 돌렸다). 새로운 사고와 한계에 도전하는 경험이 그를 매료시켰다. 열여덟 살에 그는 앞으로 15년 동안 함께 살 내연의 처를 얻었다. 그는 새로운 종교와 심지어 비범한 식단(한때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수의 멜론을 먹어야 한다고 믿는 분파에 속해 있었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떤 만족도 찾지 못했다. 가장 유명한 저작인 『고백록(The Confession)』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쓰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그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열심히 추구했지만 사실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 명망 있는 일을 맡았다. 그는 밀라노의 주교인 위대한 암브로시우스(Ambrose)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정원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이웃집 정원에서 한 아이가 몇 마디 단어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단어들은 놀이의 일부였다. 그 단어들은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서 읽으라)였다. 이것이 그의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켰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약성경을 집어서 펼쳤다. 롬 13:14절이었고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느꼈다. 그는 로마서 본문이 말한 대로 정확히 순종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신뢰했다. 예전의 생활 방식은 이제 사라졌다. 그런 후에 그는 자신이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된 종이 되었다. 그의 사고와 저술은 여러 면에서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고백록에서 가장 매혹적인 진술 중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시우스에 대해 했던 언급이다. 그의 생애에 암브로리우스가 밀라노에 왔던 시기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가 주교에 대해 감명을 받았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독백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당신의 교회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진리의 교사로서가 아니라 나에게 친절했던 한 인간으로서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점차 내가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는 해변을 따라 조용한 산책을 하던 달리 알려지지 않은 연로한 기독교인에 의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창한 주교의 친절과 어머니의 기도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유스티누스의 이름은 교회의 역사에 남아 있다. 하지만 유스티누스를 그리스도에게 이끌었던 그 노인은 잊혔다. 많은 기독교인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에 익숙하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나 그의 목사인 암브로시우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에 모범과 교훈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전략적으로 사용하셨던 사람들의 삶을 읽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게 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종종 잊혀진다. 하지만 그들의 소중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하나님은 숨겨진 자들과 잊혀진 자들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우리처럼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격려가 된다. 우리는 교회사 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친절하게 대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서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도 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충성은 명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의 『우리 주님의 해에(In the Year of Our Lord』 © 2018, pp. 41~46에서 발췌.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강사진이며 리폼드 신학교 조직 신학 석좌 교수이다. 그는 Maturity를 포함한 다양한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