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2026년 10월 06일속박된 자유 의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의지의 속박”의 네 번째 글입니다.
오늘날에는 의지가 지성의 자리를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다. 낙태 옹호자들은 자신들을 ‘선택권 옹호자’라고 부르며, 여성이 아기를 낳기로 하든 자궁 안에서 죽게 하든, 무엇이든 ‘그 여성에게’ 옳은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성적 행위든 관련된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만 하면, 즉 원하기만 하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환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 그 환자를 죽이는 것도 도덕적이다. 그렇다고 의지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낙태 반대론자나 객관적 도덕성을 믿는 사람들처럼 개인의 ‘선택’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처벌받아 마땅한 악인으로 여겨진다.
아돌프 히틀러를 선전했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사용한 니체식 표현을 빌리자면, ‘의지의 승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윤리관을 넘어 다른 영역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과학(science)’은 ‘지식’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나, 과학적 정보를 활용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기술(기술공학)에 점점 더 종속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따르면,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강자가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 형성하거나 개인이 자기 의지를 행사해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몸에까지 적용되어, 성별도 ‘태어날 때 부여받은’ 바를 따를 필요 없이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된다. 한편 진보주의자들은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적 자유를 옹호한다. 심지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흔히 의지적 행위, 곧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으로 축소한다.
오늘날과 같은 풍조 속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성경적 진리, 곧 의지가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이다.
죄의 종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된 두 편의 논문,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과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the Christian)를 저술했는데, 두 저작을 함께 묶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개념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성경이며, 특히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36).
사람들은 흔히 죄가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고 생각하며, 죄를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로 이해한다. 그러나 실상 죄는 사람을 종으로 만든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 마약 중독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음란물 중독자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도박에 중독된 자도 마찬가지다. 그처럼 극단적인 죄가 아니더라도, 죄는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성미가 사나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폭발하는 분노와 원한의 정념에 사로잡힌 종이다. 마음으로 간음하는 자는 정욕의 종이다. 도둑질하는 자와 탐내는 자는 탐욕에 매인 종이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Lectures on Romans)에서 ‘인쿠르바투스 인 세(incurvatus in se)’, 곧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 있는 상태가 우리의 근본 문제라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심하게 굽어 있어서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인 선물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며, 매사에 자기 자신만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우리의 죄악된 상태는 자기 자신을 앞세우려는 성향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만은 우리 자신을 이웃보다, 심지어 하나님보다 더 높인다. 우리의 이기심은 다른 모든 사람의 필요보다 자신의 필요를 앞세운다. 우리의 육신은 누구에게 해를 끼치든 하나님의 어떤 법을 어기든 상관없이 그저 정욕과 쾌락에 탐닉하라고 요구한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 있는 까닭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39,40).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요약한 이 말씀은 정당한 자기 사랑이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의 의지가 속박되어 있다고 해서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의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의미는 아니다. 음식을 주문할 때 그 순간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행위는 죄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유익한 행동 방침을 세우는 것도 죄가 아니다. 유혹에 부딪힐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경제 체제가 요구하는 대로 직장에서 자신의 합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 역시 죄가 아니다.
요컨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앞세우려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만족을 얻기 위해 종종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 들 수 있다. 루터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사람이 “영적인 좋은 것들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영원한 형벌 대신 영원한 상급을 받을 공로를 쌓기 위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처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선을 행하면 그 선행이 더럽혀지고 도덕적 가치를 잃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동기가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외적인 미덕을 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율법의 용도 중 하나는 제동 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죄 많은 인간들이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외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고전 윤리학에 따르면, 의지는 정념과 더불어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을 절제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다시 말해,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자기 부인의 기술을 배우고, 이성과 덕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절제하는 사람은 특정한 죄를 짓고 싶더라도 들킬까 봐 두려워할 것이며, 수치스러워지거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평판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그 죄를 짓지 않겠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익한 외적인 덕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내면 상태, 곧 우리 안에서 요동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하는 죄악된 의지까지도 판단하신다(마 5:21–30 참고).
때로는 진심으로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우리의 의지가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쩐지 의지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심지어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죄를 짓는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답답한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18–25).
죄 짓는 것을 멈추겠다는 선택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해도, 우리의 의지는 죄에 매여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주 그리스도라는 구원자가 계신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의지를 속박에서 해방하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에서 자유를 주요 주제로 다룰 때,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죄와 노예 상태를 연결 지어 말씀하신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킨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6–18,21–22).
여기서 ‘누가 당신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자. 당신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 죄인가, 하나님인가? 우리는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으며,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바울은 종이 한 주인에게서 다른 주인에게로 팔리는 것을 비유로 든다.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듯,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값으로 산 것”(고전 6:20; 7:23 참고)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다(롬 7:4 참고).
새로운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참으로 우리를 양자로 삼아 ‘아들’이요 ‘유업을 받을 자’가 되게 하신다(갈 4:1–7 참고). 우리는 장차 올 삶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성화의 때이며, 누구에게 순종할지를 배워야 한다. 복음을 통해 의의 종이 될 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가?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는 그 자체로 선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할 뿐 아니라(롬 8:2 참고), 율법에서도 벗어나게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4,6).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더는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대로,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속박 아래 있지 않은데, 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모순처럼 들리거나, 적어도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이 질문에 바울은 이제 우리가 ‘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긴다’고 대답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성령은 우리를 믿음과 성화로 이끄심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죄책감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단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나 다른 이기적인 동기로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유롭게 선을 행한다. 브래드 리틀존(Brad Littlejohn)이 『자유로의 부르심』(Called to Freedom)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는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때, 다른 이들에게 죄가 있더라도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믿음과 성화로 이끄시며, 그리하여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 있지 않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된다. 의지의 속박이 끊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진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우리가 어떻게 매여 있는 동시에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살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역설로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종으로서 온전히 순종하며, 모든 사람에게 매여 있다.” 그러고는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만물 위에 지극히 높여진다. 그리하여 영적 권능에 힘입어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며, 그 무엇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실상 만물은 그에게 복종하며, 그가 구원 얻는 일을 도울 수밖에 없다.”
루터는 덧붙여,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으로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나, 종으로서는 온갖 일을 행한다”라고 말한다. 타락한 이 세상은 여전히 죄의 속박 아래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또 다른 종류의 속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 스스로 사랑에 매이는 것이다.
“우리 이웃이 궁핍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있는 것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궁핍하여 그분의 긍휼이 필요한 자였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우리를 도우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과 행함으로 이웃을 값없이 도와야 한다. 말하자면, 각 사람이 다른 이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줌으로써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스도들’이 되고,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가 동일하게 나타나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종은 주인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의 의지를 비틀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 모두에게 해를 끼치게 만드는 잔인한 주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섬김이 있다. 곧 사랑의 섬김이다. 사랑으로 섬기려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켜야만 한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친히 “종의 형체”(빌 2:7)를 가지셨으며,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
루터는 자신의 논문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이웃 안에서 산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서 산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로 들려 올라간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 그리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로운 동시에 매여 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여전히 죄에 매여 노예 된 의지와 싸워야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싸울 힘을 얻는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우리에게 매어 두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이에 응답하여, 우리도 사랑 안에서 이웃에게 매여 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