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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4일왜 일을 하는가?

왜 일을 하는가? 나는 언젠가 이와 같은 다소 우울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즉 “우리는 아이들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 일해요. 그러면 그들은 학교에 갈 수 있고 언제가 직업을 얻을 수 있겠죠. 그리고 나면 그들이 자식들에게 신발을 사줄 수 있겠죠. 그래서 그들은…” 다시 말해서 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 기초해 볼 때 삶 자체는 다소 무의미하게 된다. 단순히 끝이 없는 순환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진짜 일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을 후원하기 위해서다.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는 성경적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다시 질문한다. 왜 일을 하는가? 나는 시편 104편에서 답을 찾았다. 시편 104편은 창조에 관한 성찰이고 아마 창 6-8장의 홍수 사건에 관한 추가 성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땅과 모든 생물을 창조하신 것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본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계와 피조물을 지탱하시는 데 있어서 그분의 친밀한 사역을 본다(1-13절).
1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축과 사람을 위해 공급하신다는 내용을 읽는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사람에게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읽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는 식물을 재배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 형상의 역할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로서 우리는 땅을 지배하고 정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정원을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창 1:26-28의 문화적 명령의 적용을 본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시편 104: 21-23절에서도 본다. 사자들이 먹이를 찾으러 나가는 것처럼 – 사자들이 창조된 대로 역할을 하는 것처럼 –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한다(12절). 여기에 놓치지 말아야 할 조화가 있다. 크고 작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그들이 원래 창조된 목적과 조화롭게 일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사자는 사자로서 “일” 하도록 만들어졌다. 우리는 형상 담지자로서 일하도록 만들어졌다. 사실 시편 기자는 중단 없이 피조물에서 피조물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로 이동한다. 다음 구절 24절에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일과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문제들 사이를 연결하길 원한다. 우리가 일 할 때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역을 반영한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경작하는 우리의 일에서 우리는 다른 중요한 무언가를 본다. 우리의 일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분을 증언하고 가리킨다. 우리의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증언하고 가리킨다. C.S. 루이스(C. S. Lewis)는 우리가 결코 평범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는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일은 천하고, 하찮고, 무의미하고 터무니없거나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의미와 중요성의 넘쳐남’이라는 표현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기다리라. 더 많은 것이 있다.
25-26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는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분명히 바다와 바다 생물들은 하나님의 위대함, 위엄, 아름다움을 증명한다. 하지만 26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즉 배와 리워야단을 평행하게 놓는다. 시편이나 욥기와 같은 시가서, 심지어 특별한 경우를 위하여 쓴 이런 예언서도 리워야단이라는 이런 생물을 언급한다. 이 생물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었다. 큰 고래인가? 공룡인가? 거대한 오징어인가?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리워야단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 이 단어를 너무 자주 경탄할 만하게 사용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이 단어에서 수사적인 효과를 감소시켰다. 하지만 이 경우에 이 단어는 적합하다. 리워야단은 경탄할 만하다.
리워야단 또한 노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이것을 놓칠 수 없다. 날아다니는 거미에 관해 글을 쓸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이 거미가 날 때 거미의 얼굴에 미소가 있었다. 이로 인해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모든 종류의 생물, 심지어 곤충들에게도 기쁨과 오락을” 제공하셨다고 결론지었다. 심지어 리워야단도 마찬가지다. 이 거대한 짐승이 유희한다. 26절에 다른 피조물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다. “그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이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과 우리가 만든 피조물이 나란히 서로 평행하게 놓여 있다. 시편 기자는 리워야단에 경탄하고 배에 경탄한다. 우리는 이것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저기 봐, 배들이 가고 있어. 놀랍군”이라고 자신에게 말했을 것이다.
선박 제조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수학과 물리, 숙련된 목공, 경험, 많은 시행착오를 통한 여러 세대의 공유된 전문 지식. 이 모든 것이 선박 제조에 필요하다. 배 항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항해 기술, 전문 지식, 근육, 강한 등, 강한 팔, 담력, 결단, 여러 세대의 집단 지혜. 이 모든 것이 배를 항해하는 데 필요하다.
우리의 시편 기자는 배들이 넓은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놀라워한다. 시편 기자는 리워야단이 넓은 바다에서 즐겁게 뛰노는 것을 보고 놀라워한다. 사실 이런 모습은 경탄할 만하다.
이 시편을 계속 읽을 때 우리는 바다를 건너 파도 속에서 노는 자연의 거대한 동물과 인간이 만든 거대한 것들 이상의 것이 여기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27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의미하는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손을 펴신 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 우리는 일에서 즐거움, 성취감, 의미를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자원을 인정한다. 그런 후에 우리는 일하러 간다. 그런 후에 우리는 만족한다. 포도주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15절). 우리의 피조물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일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우리 일의 주요 목적이거나 궁극적인 결과는 아니다. 우리 일의 주요 목적은 31절에서 나온다. 즉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 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우리의 일은 의미가 있다. 우리의 일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분을 가리킨다. 우리가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가져간다. 우리가 일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 이제 우리는 우연히 왜 우리가 일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
시편 104편에 없는 것을 알아챘는가? 성전, 성전 음악가, 제사장과 그들의 활동에 대한 언급은 한 가지도 없다. 농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포도나무를 돌보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육체노동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선박 제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배들이 다닌다.” 하나님께 영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