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2021년 12월 14일
진리를 위한 강한 성: 마틴 루터
2021년 12월 14일복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기독교인, 교회, 그리고 단체들은 그들의 확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복음의 의미와 복음을 신실하게 설교하는 사람을 두고 신학적 논란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복음이라는 이런 익숙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의지하는 것이다.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이라는 명사는 단지 70번 정도 등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약 전체가 복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단어가 더 자주 사용되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신약성경 저자들 사이에서 이 단어의 용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바울은 다른 모든 저자들이 사용한 것을 합친 것보다 세 배가 넘게 자주 그 단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다른 용도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찾을 수 있지만, 누가복음, 요한복음, 베드로, 야고보서에 있다 하더라도 이런 용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아주 단순하게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기독교 메시지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좋은 발표를 언급하기 위해 이교도 세계에서도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은 구세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종종 독자는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가정과 함께 이 단어를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때 몇 가지 요점이 강하게 다가온다. 첫째,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어구를 발견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로써 복음의 근원을 강조한다. 복음은 인간이 아닌 신적 기원에 속한다. 둘째, 복음의 특징은 몇 가지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즉 복음은 참되고(갈 2:5, 14;골 1:5), 은혜롭고(행 20:24), 영광스럽다(고후 4:4; 딤전 1:11). 셋째, 우리는 복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본다(행 15:7; 엡 1:13). 하지만 순종 또한 반응이다(벧전 4:7, 롬 1:5, 10:16; 16:26; 살후 2:8).
(바울이 자신을 율법에 반대하는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로 비난했던 자들에게 대응했을 때 그가 로마서에서 믿음의 순종이라는 생각을 사용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요소가 있다.) 넷째, 우리는 복음의 몇 가지 결과를 본다. 물론 복음은 구원을 가져온다(롬 1:16; 엡 1:13). 또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마 4:23; 9:35, 24:14)를 가져온다. 복음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킨다(골 1:23). 복음은 또한 성화의 동기이다(막 8:35; 10:29; 고후 9:13; 엡 6:15; 빌 1:27).
‘복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이 모든 방식은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도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 명시적인 구절이 있다. 이런 본문을 조사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즉 복음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구원과 새로운 생명의 모든 측면을 폭넓게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예수님이 우리를 넘어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가리키기 위해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때때로 복음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고 자기 백성 안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칭의와 성화 사역을 의미한다. 이런 구분을 언급하는 또 다른 방식은 다음과 같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약속했던 것을 신약성경이 모두 성취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때때로 복음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율법 행위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것에 협의로 사용된다.
복음이라는 단어의 폭넓은 의미를 보여주는 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말씀하는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런 사용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계 14:6-7에서 또 다른 일반적인 사용을 본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여기서 복음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이다.
더 자주 복음이라는 용어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복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우리는 이것을 고전 15:1-4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복음은 예수님의 구원을 가져오는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이다.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대해 쓴다. 그는 또한 이 복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1, 15-16)
여기서 복음은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사역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와 유사하게 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딤후 1:8-10; 2:8)
좁은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의 글에서 매우 흔했다. 우리는 존 칼빈의 사고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은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믿음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 즉 복음 자체를 위해 환유(한 개념의 이름을 이 개념과 연관된 또 다른 개념에 사용하는 것)에 의해 표현된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런 구분에 기초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한다. 마치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믿음만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또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에게서도 분명하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 대한 주석 초반에 모든 교리를 율법과 복음으로 나눈다.
“교회의 교리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에서 신성한 성경의 요점과 핵심을 이해했다. 율법은 십계명(the Decalogue)으로 부른다. 또한 복음은 중재자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 거저 주시는 죄의 용서에 관한 교리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길고 흥미로운 인용문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복음에 대한 그런 성찰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공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율법과 복음 둘 다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이며,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공포이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용어가 은혜 언약의 옛 시대와 새 시대에 사용될 수 있을지라도, 실제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두 계시를 지시한다. [바빙크(Bavinck)는 여기서 다른 많은 신약 본문을 인용한다]…. 이런 본문에서 율법과 복음은 요구와 선물, 명령과 약속, 죄와 은혜, 병과 치유, 죽음과 삶으로서 대조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나오는 율법,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복음; 율법은 자연을 통해 알려지고 복음은 단지 특별 계시를 통해서 알려진다. 율법은 완전한 의를 요구하지만 복음은 완전한 의를 허락한다. 율법은 사람들을 행위에 의한 영생으로 인도하고 복음은 믿음에서 허락된 영생의 풍성함에서 나오는 선행을 낳는다. 율법은 현재 사람들은 정죄한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만 복음은 단지 복음을 듣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말한다.
복음을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뚜렷하고 성경적이고 귀한가!
교회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모두에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다.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영어권 세계에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주었다. 마 28:18-20절에서 예수님이 주신 지상 명령에 의하면 참된 복음은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첫째, 남자와 여자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의미에서. 둘째 그들을 가르쳐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가르쳤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는 넓은 의미에서. 복음을 위해 모두 참된 복음 전도를 증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