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은사
2026년 01월 28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
2026년 02월 05일성령의 열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성령”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제목부터 참 좋다. “성령의 열매.” 정말 활기 넘치고 긍정적인 말이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바라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여길 수도 있다. 피상적인 기독교에 속아, 겉보기에 더 화려해 보이는 ‘영적 은사들’에 매료되어, 참된 영적 열매가 그늘에서 시들도록 내버려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그 성령은 누구신가?” 하는 또 하나의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성결의 영이시며, 우리 안에서도 동일한 궤적을 따라 같은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롬 1:4; 엡 1:15–21 참고).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알려진 대로 하나님을 점점 더 닮아 가도록 이끄신다. 복음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분께 속한 자로서 우리도 거룩하게 되라고 말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성육신하신, 죄 없으신 주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 진실되게 받아들인다면,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구세주를 본받아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울 것이다. 그분을 보라. 그러면 진실로 성령으로 충만한 분을 볼 것이다(요 1:32,33 참고).
그것은 우리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아름답고도 거룩한 목록으로 이끈다. 먼저, 성령의 열매가 육체의 일들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대조하는 두 목록이 일대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둘은 분명히 서로 다른 토양에서 자라고, 서로 다른 공기 가운데서 길러지며, 서로 다른 뿌리에서 뻗어 나온 산물이다. 심지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성령의 열매와 비슷한 도덕성을 외적으로 드러낼 때에도 마찬가지다.
또한 성령의 열매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는 점에 유의하라. 이는 색깔이나 맛에 따라 원하는 대로 다양한 과일을 골라 담아 둔 그릇이라기보다, 같은 하늘의 포도나무에 달린 단일한 포도송이로 보아야 한다. 포도알 하나하나도 맛있지만, 모두가 동일한 하늘의 맛과 빛깔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각각의 요소들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어느 하나를 설명하려면 다른 요소들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영어 번역본들도 그 미묘한 차이를 포착하려고, 동일한 단어를 서로 다른 덕목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성경의 문제들을 다룰 때 흔히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해야 하며, 더 나아가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중점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열매를 세 개씩 묶어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들을 분리할 수는 없으며, 고립시켜서도 안 된다.
이런 단일성을 고려하면, 이 열매의 다양한 요소들은 서로 보완적이다. 이것들은 서로 나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질 때 가장 달콤한 맛을 낸다. 어떤 요소가 더 뚜렷하거나 더 성숙하게 형성될 수도 있지만, 다른 것들 없이 어느 하나만 나타나는 일은 없다. 가끔 이런 증거들 중 하나가 나타난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능력을 보여 주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요소가 일관되게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인마다 경험과 성숙의 정도가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리 안에 이 열매가 없다면 우리에게 성령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이 있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마땅하다. 이 덕목들은 그분에게서 온 것이며, 그분의 인격과 기쁨을 반영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거룩한 습관이다(갈 5:18 참고). 하나님의 자녀는 단지 악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분의 아들들이 간절히 추구하는 거룩함이라는 덕목이 존재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갈망하며 거룩해지기 위해 고투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거룩해질 수 없다. 죄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자라지만, 거룩함은 경작해야만 한다”(찰스 스펄전). 성령은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로 하여금 이 경건함을 갈망하게 하시고, 그것을 키워 갈 능력도 주신다(빌 2:12,13 참고).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악덕을 도덕이나 종교의 색채로 덧칠한다 해도, 성령이 없으면 결국 육체의 일들만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열매는 무엇일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구별하되 분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전체 목록뿐 아니라 첫 번째로 묶인 세 덕목의 문을 열며, 그것들을 이끌고 확고히 한다. 특히 이 세 덕목은 참된 기독교의 독특한 은혜를 보여 준다.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그 하나님께 사랑받음으로써 생겨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로,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에게로 넘쳐흐른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희락이다. 희락은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그분과 그분이 자기 백성인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희락은 낙담과 영혼의 무기력을 집어삼키고, 우리에게 활력을 주며, 우리를 고양시킨다. 그것은 진리에 뿌리를 둔 참된 영적 기쁨으로(고전 13:6 참고), 그리스도인의 환난을 뛰어넘고 그것을 변화시킨다(살전 1:6 참고). 또한 희락은 세속적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이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에서 발견하는 행복이다.
희락과 더불어 화평이 따른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인데(롬 5:1 참고), 어린양의 피로 우리 영혼이 씻음 받을 때, 그 화평이 우리의 양심으로 그대로 옮겨진다. 그것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우리가 마음과 생각을 지킬 때(빌 4:7 참고), 이 화평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려는 뜻이 흘러나온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고 칭찬받기를 기꺼이 바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빌 2:1-4 참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엡 4:3) 지키고자 애쓰게 된다.
이 열매들에 이어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 뒤따른다. 이것들은 특별히 관계적이고도 사회적인 성격을 띠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째는, 성급하게 화내기보다 하나님을 닮아 성내기에 더딘 것으로(약 1:19 참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는 마음이고, 반격하기보다 모욕을 참아 낼 준비가 된 마음이며(고전 13:4 참고), 신속하게 용서하고 죄를 덮어 주는 마음이다(벧전 4:8 참고).
자비는 하나님을 본받은 영혼의 감미로움일 뿐 아니라(롬 11:22; 딛 3:4 참고),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며(고후 10:1 참고),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평온함과 온화함이다(고후 6:6 참고). 그것은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나타난다. 자비는 우리를 곁에 있고 싶은 기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친화적인 은혜로, 지체 없이 부드럽게 대답하며(잠 15:1 참고), 어려운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게 한다.
다음으로 양선이란, 저주하기보다 축복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준비된 태도이다. 그것은 해를 끼치려는 유혹에 저항하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단순히 마음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행함으로 나아가려는 선한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묶인 세 덕목은 갈라디아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졌을 만한 것들로, 그 사회에 만연했던 악덕과 명백히 대조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거룩함이 단순히 문화를 거스르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단지 시대 정신의 정반대 극단으로 치우치기만 하면 본질적으로 덕이 되는 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참으로 초자연적인 것으로, 죄의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가지게 된다.
첫째는 충성으로, 특히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약속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 충성은 동료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신실하고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활하고 미덥지 못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다음은 온유이다. 이것은 쉽게 격분하지 않고 오히려 금방 진정되는 은혜로, 하나님과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나타내는 반응(그리고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원망)을 다스리는 덕목이다.
끝으로, 절제는 이 세상의 삶에서 모든 좋은 것에 대해 도를 넘지 않는 태도로, 감사히 받되 탐욕스럽지 않고, 분별 있게 즐기되 지나치지 않으며, 무절제하게 몰두하기보다 절도 있게 대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과 관련하여, 이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성령께서 우리를 그런 열매들로 이끄시면, 우리는 그 어떤 법도 이를 정죄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거룩함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판에 그대로 새긴 것과 같다.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임을 확신할 것이다.
이제 신성한 명령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결과가 제시된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것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 곧 마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이를 추구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동시에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 이 열매는 대표적일 뿐 포괄적이지는 않다. 바울이 제시한 악덕과 덕목, 은사와 은혜, 죄와 어리석음의 목록은, 이것들 말고는 해당 범주에 속하는 특성이 없다는 의도를 시사하지 않는다. 어느 목록에 있는 죄를 피했다고 해서 우리가 죄인이 아닌 양 생각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이 덕목들 중 한두 가지가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시 한 번 기억하라. 이 목록은 그리스도를 닮은 전체적인 성품을 암시하는 동시에, 갈라디아 사회에서 특별히 빛을 발했을 특정한 자질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당신의 상황에서도 주님을 닮은 몇몇 측면을 짚어 내어, 당신이 어린양을 따르는 자임을 특별히 보여 주는 표지로 삼을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에는 간극이 있다. 어떤 사람은 열매를 다루는 이 글을 읽다가, 자신이 이 모든 덕목을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의 수준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 상태에 안주하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경건함에서 성장하고 거룩함에서 진보해 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신체적 성숙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더라도, 이 모든 은혜가 예순 살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열 살 소년에게서도 나타나고 작용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같은 은혜이지만 적절한 표현은 서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영적 유아기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수십 년 동안 그 길을 걸어온 사람과 같은 정도와 수준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떤 신자들은 체질과 성격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어려움을 겪는 반면, 다른 면은 더 수월하게 나타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침체된 시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비록 꽃이 피지는 않았더라도 싹을 틔운 영적 열매는 뿌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적이고도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모습이 없다면, 영적 생명이 없거나, 적어도 영적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런 덕목들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게 해 달라고, 생명의 뿌리와 경건의 열매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하고도 확실한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