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천
2025년 08월 09일
오순절
2025년 08월 09일예루살렘에서, 모든 민족으로, 그리고 다시 그 예루살렘으로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사도들의 행적”의 두 번째 글입니다.
언젠가 선교를 반대하는 한 정통파 유대교인에게 히브리 성경(구약성경)의 전체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이 질문에 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고 또는 대체로 어떤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첫 번째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그렇다. 그것이 엄밀히 예루살렘에서 첫 세기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구속의 때가 임한 것을 깨닫지 못한 이유였다. 어쩌면 랍비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처음에는 사도들도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도행전의 문맥은 전체 구속사다. 만약 내가 구약성경의 전체적 메시지를 말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복, 저주, 회복된 복.” 우리는 “복”이라는 말을 너무 도식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그래서 종종 그 깊은 의미를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 아래 살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우리를 비추셨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것이 복의 의미다(민 6:24~26).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낙원을 상실하고, 복의 반대 개념인 하나님의 저주 아래 들어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모든 족속에게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2~3). 이 복의 약속은 이전 장들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타락 이후에는 복을 주신다는 것이 타락으로 인한 저주를 제거하고 창조주와 복된 관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성경 전체의 주제로 제시된다(갈 3장).
그러면 복에는 특별히 무엇이 포함될까? 에덴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그들의 관계는 모든 면에서 좋았다. 사랑의 아버지는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을 다스리셨다. 아담과 하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조화가 있었다. 사람은 순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죄가 없었다. 죽음도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타락의 저주로 상실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복된 상태의 회복은 아버지와의 회복된 관계, 죽음의 제거, 생명나무로 재접근, 거듭난 또는 “할례 받은” 마음(신 30:6)을 의미할 것이다(이 이야기에 관한 유용한 도표를 보려면 www.chaim.org/bigpicture.pdf를 찾아보라).
우리는 후기의 선지서들을 통해 이 회복된 낙원이라는 주제가 오실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사 11:1~11). 복을 충분히 회복하려면 “둘째 아담”께서 친히 저주를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신실하게 순종하심으로써 복을 얻어야 했다(사 53장).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성경의 공통 주제다. 곧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반복된 핵심 주제다. 이 모든 것은 사도행전의 선교 사역을 이해하는 데 배경을 제공한다. 사도행전은 승천(복음의 핵심 주제)하신 후에 예수님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 가운데 구원을 어떻게 계속 일으키셨는지를 자세히 제시한다(눅 1:32–33, 54–55, 68–79, 2:29–32, 3:6, 4:18–19, 43, 24:46–47).
사도들의 질문
사도행전 첫 부분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바리새인들과 다름없이 제자들도 메시아의 구속의 본질과 범주를 잘못 이해했다. 예수님의 답변은 제자들을 깨닫게 하면서도 알쏭달쏭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는 제자들의 소망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이 제자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웅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답변을 주셨다.
생육함과 번성함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파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12:24). 70인역(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누가가 이 사실을 언급할 때 70인역 창세기 1:28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두 헬라어 동사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울도 이 똑같은 두 동사를 사용하여 생육함과 번성함의 궁극적 실현이 복음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골 1:6, 10). 그러므로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구속받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을 재확립하는 것이다. 구속의 범주는 보편적이고 타락의 저주를 전복시킨다.
바벨의 반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해 주어지는 은사냐 아니냐의 논쟁은 여기서 다룰 사안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종종 이에 대한 논쟁은 사도 시대 당시 방언 현상이 갖는 의의를 흐려놓곤 한다. 바벨에서 반역적이고 오만한 인류는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흩어졌다. 오순절은 ‘샤부오트’로도 불렸는데, 여호와께 밀 수확물을 바치는 유대교의 한 절기였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샤부오트’(오순절)에 율법이 낭독되었고, 애굽에서 나온 이방인들도 자기들이 쓰는 70 개의 언어로 낭독된 율법을 들었다고 한다(데니스 존슨, 『구속사로 본 사도행전의 메시지』, P&R, 1997, 60쪽). 오순절에 수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행 2:8). 복음이 주변으로 더욱 전파되었을 때 유대인의 피가 절반 정도 흐른다고 할 수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표적이 일어났다. 또 욥바에서, 곧 과거 선지자 요나가 이교도에게 회개를 선포해야 하는 소명을 저버리고 도망친 도시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이 구원에 포함되는 것에 관한 환상을 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 결과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이 복음을 믿었고(행 10장), 오순절의 방언역사가 다시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연합시키고 인간과 하나님, 다른 족속과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분리를 무너뜨렸다. 흩어지는 일이 아니라 모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복
고넬료에 관한 베드로의 보고를 듣고 나서,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행 11:18)는 반응을 보였다.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격렬히 추적하고 있던 선교 반대자 랍비 사울은, 영광스럽게도 주님으로부터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행 9:15)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이후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 복음은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전파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이방인을 교회 공동체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놓고 고심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 아래 그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메시아 공동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이방인을 포함시키는 일이 선지자들이 다윗 왕국의 회복과 민족들의 추수에 관해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행 15장. 암 9:11~15를 인용함)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것이 메시아를 통해 성취되고 있었다. 시편 72:17이 염두에 두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복이 궁극적으로 다윗의 아들을 통해 달성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두 갈래” 세계 선교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율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2~23).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을 제공하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처음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 이스라엘을 넘어 적용됨을 이해했다.
이사야 42:1~7과 49:1~6은 섬기는 종으로서의 메시아께서 “두 갈래 선교 곧 이스라엘에 대한 선교와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펼칠” 것을 계시했다(데니스 존슨, 『구속사로 본 사도행전의 메시지』, P&R, 1997, 40쪽).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계속 전파되고 있다. 복음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구원의 능력이다(롬 1:16). 유대인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지금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은 거꾸로 유대인들에게 다시 전해질 것이다. 장 칼뱅, 존 머레이, 게할더스 보스, 조나단 에드워즈, 존 오웬과 같은 신학자들은 모두 하나님이 여전히 복음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새 시대”를 제공할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명예교수)인 클레어 데이비스 박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복음전도 활동의 부흥은 항상 세계 복음전도 활동의 부흥과 맞물려 있었다고 말했다.
영광스러운 우리의 목적
살다보면 세속적이고 지엽적인 관심사에 빠지기 십상이다. 우리는 항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매일의 판에 박힌 일상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는 부르심 받은 영광스러운 목적 곧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상처 입은 자들을 싸매주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증언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일은 매우 놀랍고 경이로운 일의 일부로서,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던 일이다(벧전 1:10). 하나님이 우리의 이웃 속에서 행하는 전도 사역과 세계 전역에서 펼치는 선교 사역에 대한 우리의 열심을 새롭게 하시기를 바란다. 또 우리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복을 받도록 기도하고 믿음으로 사역하는 일에 힘을 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메시아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수고하고 계신다. 사도행전 속편은 아직도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민족으로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는 이 복음 사역에 다시 헌신해야 한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