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속 가운데 나타난 성령의 사역
2026년 01월 28일
성령의 은사
2026년 01월 28일“나는 성령을 믿사오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성령”의 세 번째 글입니다.
현대의 성경 번역본들이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곤 하는데, 때때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번역본들이 지닌 보편적인 한 가지 유익이 있다. 더는 성령을 ‘그것’으로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문제의 주범은 많은 사랑을 받는 킹제임스 성경이다(예컨대 로마서 8장 26절에서는 성령을 “the Spirit itself[그것 자체]”라고 표현한다).
사실 ‘프뉴마(pneuma, ‘영’ 또는 ‘바람’을 의미하는 헬라어)’가 중성 명사이기 때문에, 중성 대명사인 ‘그것(it)’이 사용된다. 그런데도 요한복음 14장 26절과 15장 26절은 성령을 남성 대명사인 ‘그(헬라어 에케이노스, ekeinos)’로 지칭하여, 성령의 인격적 본성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곧 성령은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인간의 인격성은 바로 창조주의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로서 창조되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며, 또한 삼위일체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반면 우리는 창조된 존재로서, 단일한 방식의 인격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분을 미미하게 반영할 뿐이며, 하나님은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원형이시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언급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에서 ‘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의성어로, 그 소리 속에 단어의 의미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움직이는 바람, 때로는 폭풍 같은 바람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5장 3,4절에서 보듯이, 성경은 성령께서 신적이고도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성령은 거짓말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인격적 특성),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한편 ‘성령’이라는 이름에는 신비롭고도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바람(pneuma)은 임의로 불며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pneuma)도 그러하시다(요 3:8 참고).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성령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셨는데도, 성령의 정체를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16:13,14 참고)
성령께서 얼굴 없는 분으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그분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도 없고, “성령의 교통하심”(고후 13:13)을 경험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분의 이름에는 ‘아버지(성부)’나 ‘아들(성자)’ 같은 인격적인 분위기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분을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성경이 가르치는 두 측면을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첫째, 성경은 성령이 누구신지 밝히기 위해 일련의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분은 “성결의 영”이자 “양자의 영”(롬 1:4; 8:15)이며, “영광의 영”(벧전 4:14), “진리의 영”(요일 4:6)일 뿐 아니라, 그 외에도 더 많은 이름으로 불리신다.
특히 주 예수님이 요한복음 13-17장의 고별 강론에서 성령을 어떻게 소개하시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성령께서 자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제자들에게 되어 주었던 모든 존재가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자와 성령은 위격적으로 구별되지만, 구속의 경륜 안에서 서로 얽혀 있다. 예수님은 교사이자 인도자요 상담자이시며,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분이다(요 14:2 참고). 성령은 그런 예수님과 같은 ‘또 다른’ 분으로(16절 참고), 가르치고 인도하고 상담하시며, 고아들을 하나님의 집과 마음으로 이끄신다. 더욱이 그분은 영이시므로, 인격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이 일을 행하신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역으로, 신학자들이 말하는 경륜적 사역의 한 부분이다. 이런 사역의 배후에는 성부, 성자와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성령의 존재론적 교제가 있다. 이것이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어두운 비밀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계시 가운데 자신을 참으로 나타내 보이신다(요 1:18 참고). 그분은 자신을 계시하신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분이시다.
둘째,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존재 방식과 삼위일체 내적인 삶에 관해 가르친다. 여기서는 몇 가지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고전 2:10) 통달하시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철저히 아신다. 성령과 성부 사이, 성령과 성자 사이에는 완전한 상호 이해와 지식이 있으며, 숨겨진 것이 없다. 더 나아가, 성령은 성부와 성자 각 위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마치 성령께서 아버지(성부)로서의 방식과 아들(성자)로서의 방식으로 표현된 신적 속성의 사랑과 영광을 영원하고도 무한히 마시는 것과 같다.
게다가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 헌신, 곧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쏟아부어지는 모든 인격적 속성들을 온전히 흡수하고 즐거워하신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개별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아실 뿐 아니라, 서로에게 어떤 분이신지도 경험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요 14:16; 행 2:33 참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요 15:26) 분으로 묘사한다. 성부로부터 ‘보냄 받으심(미래 시제)’은 경륜에 속한 것으로, 오순절을 내다보고 있으며, 바로 그날 성취되었다(눅 24:49; 행 1:8 참고). 반면 ‘나오심(현재 시제)’은 지속적인 것으로,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약 학자들은 이 동사들의 시제 변화가 지니는 중요성을 무시하고, ‘성부로부터 보냄 받으심’과 ‘성부로부터 나오심’을 동의어로 간주한다. 그러나 동사의 시제 변화는 실제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나오심’은 단순히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인정한 대로, 여기에는 성령께서 언제나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성부 안에 있는 모든 충만함을 발산하신다는 사실이 함의되어 있다. 동시에 우리가 보았듯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상호 관계 가운데 나타나는 깊은 풍성함을 통달하고 경험하신다. 서방 교회가 오랫동안 고백해 온 대로, 이 영광스러운 사귐 가운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라틴어 필리오케, filioque) 나오신다. 더욱이 성령은 ‘보냄 받으심’(경륜적)에서 성부와 성자의 계시적 의지에 기꺼이 순종하시는 동시에, ‘나오심’(존재론적)에서 자신이 공유하는 바 형언할 수 없는 관계의 영광을 자발적으로 드러내신다. 성령은 자신이 소유하시는 완전한 신성을 드러내심으로써, 삼위일체의 사귐 가운데 있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지성의 한계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지평을 탐구하며 발돋움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한계로 낙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지닌 끝없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바라본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시고, 성자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그분을 더욱 온전히 알아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요한과 함께 이렇게 고백한다. “복되신 성령이여, 참으로 당신은 우리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누리도록 인도하셨나이다”(요일 1:3 참고). 또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과 함께 노래하는 법을 배운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두 분으로부터 나오시는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 가운데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노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 성령이시여,
영원한 공로를 찬양하나이다.
아멘, 아멘!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