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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4일진리를 위한 강한 성: 마틴 루터

마틴 루터는 역사의 거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두 번째 천년기의 가장 중요한 유럽 인물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선구자적인 개혁자였고 하나님이 기독교와 서구 세계의 변혁을 일으키기하기 위해 사용하셨던 개혁자였다. 그는 독일 종교개혁의 확고한 지도자였다. 교회의 타락과 배교의 시대에, 그는 용감한 진리의 옹호자였다. 그의 강력한 설교와 펜은 순수 복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하고 역사상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에 대한 많은 책이 쓰였을 것이다.
루터는 근면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스(Hans)는 결국 광산과 제련소, 다른 사업에 대한 공동 관심에서 얼마큼의 부를 얻었던 구리 광산 업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경건했지만 종교적으로는 미신적이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엄격한 규율 아래 자랐다. 그는 성공한 변호사가 되기 위해 근면한 아버지에게서 훈련받았다. 이를 위해 그는 아이제나흐(1498–1501) 에르푸르트 대학(University of Erfurt)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그는 1502년에 문학사,1505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그가 21살이던 1505년 7월에 예상치 못한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심한 뇌우를 만나 근처에서 일어난 벼락에 의해 땅바닥에 쓰러졌다. 겁에 질려 그는 광부들의 가톨릭 후원자에게 “성 안나(St. Anna)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그러면 저는 수도사가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루터는 폭풍우에서 살아남았고 자신이 했던 극적인 서약을 성실히 이행했다. 2주 후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가 교육을 낭비하는 것에 분노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자기 의에 빠지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을 내몰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기도, 금식하고, 철야 기도와 추위로 나 자신을 괴롭혔다. 서리만으로도 나는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것을 함으로써 수도원 질서의 엄격한 준수와 나의 금욕적인 삶에 주목하시는 하나님 말고는 내가 다른 무언가를 추구했던가?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꿈속에서 걸었고 진정한 우상숭배 속에서 살았다. 나는 그리스도를 단지 무지개 위에 좌정하신 엄하고 끔찍한 심판관으로만 여겼다.” 다른 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수도사였을 때, 나는 거의 15년 동안 매일의 희생으로 나 자신을 지치게 했고, 금식, 철야기도, 기도, 다른 매우 엄격한 일로 나 자신을 고문했다. 나는 진정으로 나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생각했다.”
1507년 루터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첫 미사를 집전했을 때 빵과 잔을 처음 들면서 그는 그것들이 화체라는 생각에, 위엄에 눌려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는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내가 누구이건대 신성한 위엄을 향해 눈을 들고, 나의 손을 신성한 위엄 위에 올려야 하는가? 나는 먼지이고 죄로 가득 차 있고 살아계시며 영원하고 참되신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두려움은 단지 하나님의 용납을 위한 그의 개인적인 투쟁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1510년 루터는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 교회의 부패를 목격했다. 그는 스칼라 산타(the Scala Sancta)(“성 계단”)를 올라갔다. 이 계단은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나타나셨을 예수님이 오르셨던 계단으로 추정된다. 우화에 따르면, 계단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졌고, 사제들은, 하나님이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주장했다. 루터도 주기도문을 반복하고, 계단마다 입을 맞추고, 하나님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가 꼭대기 계단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어떤 느낌도 없었다.
루터는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the University of Wittenberg)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성경 교수로 임명되었다. 루터가 1546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후 34년 동안 교수직을 유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 가지 질문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죄인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 바로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였다
1517년 존 테첼(John Tetzel)이라는 도미니카 수도사가 죄의 용서를 제안하며 비텐베르크 근처에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이런 관행은 십자군 전쟁 중에 교회를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시작되었다. 평민들은 죽은 사랑하는 사람을 연옥에서 자유롭게 했다는 문서를 교회에서 살 수 있었다. 로마는 이런 사기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 수익금은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 끔찍한 권력의 남용이 루터를 격노하게 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면죄부에 관한 95개 반박문 목록을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 교회 정문에 못으로 박았다. 그런 반박문을 교회 문에 못 박는 것은 당시의 학구적인 논쟁에 있어 흔한 관행이었다. 루터는 대중 혁명이 아니라 교수진들 사이에 차분한 토론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인쇄업자의 손에 한 권이 넘어갔는데 인쇄업자는 몇 주 만에 95개의 반박문이 인쇄되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보았다. 루터는 하룻밤 사이에 영웅이 되었다. 그와 함께 종교개혁이 본질적으로 시작되었다.
탑 체험
루터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루터는 영적 투쟁 중에 로마서 1장 17절에 사로잡혀 있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그분의 적극적인 의로, 즉 죄를 벌하시는 보복을 의미하는 정의로 이해했다. 이런 조건에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미워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의 탑에 앉아 있는 동안 이 본문을 묵상했고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의미와 씨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나는 나무랄 데 없는 수도사로 살았다. 하지만 나는 극도로 고통받는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고행으로 달래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미워하였다. 나는 무례하지는 않았더라도, 분명히 크게 중얼거리면서 은밀하게 하나님에게 분노했다. “사실 마치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원죄를 통해서 영원히 잃어버린 그런 비참한 죄인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복음으로 고통에 고통을 가하게 하는 것 없이, 또한 복음을 통해 그분의 의와 진노로 우리를 위협하게 하는 것 없이 십계명의 율법에 의해 온갖 종류의 재앙에 짓밟힌다.” 따라서 나는 극히 괴로운 양심으로 몹시 화를 냈다. 그런데도 나는 성 바울이 원했던 것을 가장 간절히 알기 원하면서 끈질기게 그 장소에서 바울을 두드렸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 묵상하면서 말씀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사는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복음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수동적인 의를 의미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나는 내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다. 거기서 완전히 다른 성경 전체의 얼굴이 내게 나타났다. 따라서 나는 기억을 통해 성경을 훑어보았다. 나는 또한 다른 용어에서 유비를 발견했다. 즉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했다.
루터가 회심한 시점이 논쟁이 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점이 1508년에 일찍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터 자신은 그가 95개의 반박문을 게시한 지 2년 후인 1519년에 일어났다고 썼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회심의 실체다. 루터는 구원이 죄인을 위한 선물이지 의인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그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을 신뢰함으로써 구원받는다. 따라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는 종교 개혁의 중심 교리가 되었다.
교황의 권위를 공격하기
이신칭의는 믿음과 행위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nd works)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충돌했다. 따라서 교황은 루터가 “위험한 교리”를 설교했다고 비난하고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루터가 이를 거절하자 그는 1519년에 선도적인 가톨릭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n Eck)와의 공개 토론을 위해 라이프치히로 불려갔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존 후스(John Hus)가 제기했던 요점 즉 교회 공의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언했다.
루터는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는 최근에 조작해낸 고안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종교적 미신은 니케아 공의회와 교회 역사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외쳤다. 설상가상으로 그것은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을 취함으로써 루터는 로마의 주요 신경인 교황의 권위를 자극했다.
1520년 여름 교황은 로마 교황인(印)(불라, bulla) 또는 붉은 봉인으로 봉인된 칙령, 즉 교서(bull)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주여! 일어나 당신의 대의를 판단하여 주십시오. 야생 멧돼지가 당신의 포도밭에 침입했습니다.” 교황은 이 말을 통해 루터를 대혼란을 일으키는 통제되지 않은 동물로 언급하고 있었다. 루터의 가르침 가운데 41개가 이단적이거나, 중상적이거나, 거짓으로 여겨졌다.
이것과 함께 루터는 회개할 시간인 60일이 주어졌고 그렇지 않으면 파문을 당해야 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공식적인 저항이나 다름없었다. 토마스 린제이(Thomas Linds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가난한 수도사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 소문이 독일, 사실 전 유럽을 통해 전해졌는데 20세기에 사는 우리가 그때의 전율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이 루터를 환호했지만 교회의 눈에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보름스 의회(The Diet of Worms): 루터의 입장
1521년 젊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는 루터를 독일 보름스에 있는 보름스 의회에 출석하도록 소환했다. 이것은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배교자인 수도사 루터에게 탁자 위에 완전히 진열된 그의 책들이 보였다. 그런 후에 루터는 이 책의 가르침을 철회할 것을 요청을 받았다. 다음날 루터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말로 답했다. “내가 성경의 증거나 명확한 이성으로 확신하지 않는다면(왜냐하면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만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도 종종 오류를 범했고 모순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인용했던 성경에 매여 있고,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안전하지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이 도전적인 말들은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되었다.
카를 5세는 루터를 이단자라고 정죄했고 그의 머리에 높은 현상금을 걸었다. 루터가 보름스를 떠날 때, 그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비텐베르크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21일의 시간이 있었다. 그가 가는 동안 그의 지지자 중 일부가 그의 목숨을 우려하여 그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 성(the Wartburg Castle)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8개월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었다. 이 감금 기간에 루터는 성경을 평민들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길은 더욱더 빠르게 번지게 되었다.
1522년 3월 10일, 루터는 설교에서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설교했고 썼을 뿐입니다. 나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내가 잠자는 동안… 어떤 왕이나 황제가 교황권에 그런 손실을 입히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은 교황권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자신을 진리의 대변자로 사용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은 루터와 그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흔들림 없는 기초 위에 기반을 두었다.
1525년 루터는 캐서린 폰 보라(Katherine von Bora)와 결혼했다. 이 놀라운 여성은 종교개혁의 대의에 헌신한 수도원에서 탈출한 수녀였다. 이 두 사람은 결혼하기 위해 그들이 했던 수도원 서약을 거부했다. 루터는 42세였고 케이티는 26세였다. 그들은 결혼해서 6명의 자녀를 낳았다. 루터는 매우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고 이것은 그의 사역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루터는 생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강의, 설교, 가르침, 글쓰기, 논쟁과 같은 많은 일을 했다. 개혁을 위한 이런 작업으로 인해 그는 강도 높은 신체적, 감정적 대가를 치렀다. 각각의 전투는 그에게서 중요한 무언가를 뽑아냈고 그를 더 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곧 병에 걸렸다. 1537년 그는 너무 아파서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 1541년 그는 다시 심각한 병에 걸렸다. 이번에는 루터 자신도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리라 생각했다. 그는 다시 회복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14년 동안 그는 여러 가지 병에 시달렸다. 그는 여러 질병 중에서 담석증을 앓았고, 심지어 한쪽 눈의 시력도 잃었다.
끝까지 신실하다
1546년 초에 루터는 그의 고향인 아이슬레벤으로 여행을 갔다. 그는 거기에서 설교했고 그 후에 만스펠드(Mansfeld)로 갔다. 만스펠드의 백작인 두 형제가 그에게 가정의 불화를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루터는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을 보고 매우 만족했다.
그날 저녁 루터는 병에 걸렸다. 밤이 깊어갈 무렵 루터의 세 아들 요나스, 마틴, 바울과 몇몇 친구들은 루터의 곁을 지켰다. 그들은 그를 꼭 껴안았다. “존경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가 전하셨던 그리스도와 교리를 변함없이 지지하시지요?” 이 종교 개혁자는 뚜렷하게 “그렇다”라고 말했다. 그는 1546년 2월 18일 이른 시간에 그가 유아 세례를 받았던 (성당의) 성수반(聖水盤)이 보이는 곳에서 죽었다.
루터의 시신은, 수천 명의 조문객이 길에 줄지어 서고, 교회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비텐베르크로 옮겨졌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설교단 앞에 묻혔다. 이 교회는 29년 전 그가 유명한 95개의 반박문을 못 박았던 바로 그 교회였다.
루터가 죽자마자 그의 아내 캐서린은 그의 마지막 영향력과 기독교에 미친 기념비적인 영향에 관해 기록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고 누가 슬퍼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 까요? 그는 도시나 한 나라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위해서도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루터의 목소리는 그의 시대의 유럽 대륙 전역에서 울렸고 그 이후로 수 세기 동안 전 세계에 메아리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