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2022년 03월 02일
장로의 아내
2022년 03월 07일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섭리“의 네 번째 글입니다.
세계 역사상 기독교의 복음처럼 냉소적으로 초대하는 종교도 없을 것이다. 복음이 시작될 때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듣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존 파이퍼(John Piper)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것은 죽음으로의 초대이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직관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두 손으로 목숨을 움켜쥐고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수세기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던 말씀의 자력은 어디에 있는가?
제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에게 이에 대한 답은 즉각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았다. 사역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선포하셨다. 그때 도마는 동료 제자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6). 하지만 그리스도가 죽으실 것이고, 그분을 따를 때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당혹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막 9:30-32; 요 12:23-26).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있고 난 뒤에야 복음으로의 초청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온전한 의미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이후 사도들의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장엄한 빛 안에서 영광스럽게 이해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체현된 “살기 위해 죽는다”는 원리가 신약 성경 설교와 가르침에서 반복되는 주제가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주제는 여러 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에 관해 언급한다(6:3). 마찬가지로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신앙 생활의 목표를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으로 언급한다(3:10).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것과 지속하는 것을 죽음과 연관지어 취급한다.
사도 베드로도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같은 어조로 말한다. 박해 때문에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자신들의 고난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면서 그는 (다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언급한다(벧전 2:24).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가장 간략한 설명이다.
베드로의 진술에서 두드러지는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경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경험하신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셨던 것은 그가 자신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때, 성령은 영적 죽음의 영역에서 우리를 끌어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이 구원하는 연합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기본적인 의미다. 이 연합에서 우리는 중생과 칭의를 통해 주어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을 때 불가능했던 것(하나님의 길을 걷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을 이제 우리는 능력을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하셨던 것은 그가 자신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죄에 “대해” 죽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의 단어 선택이 또한 도움이 된다. 칼빈이 그의 주석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향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더이상 본성적으로 악한 이 세대를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좌정해 계신 위의 것들에게로 향하게 된다(골 3:1-2).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향을 갖는다 것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향을 갖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영적인 죽음에서 해방시키신 분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한 본보기로써 그리스도의 승귀(昇貴)된 인성 안에서 그분을 바라볼 것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즉 그리스도가 본을 보이셔서 우리가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말을 할 때 베드로는 이례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벧전 2:21). 그것은 글자의 윤곽을 추적하여 글쓰기를 배우는 어린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앙 생활의 기초에 관해서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성의 본보기가 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 편지에서 베드로는 이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중요한 특징 중 일부를 설명한다. 즉 그것들은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다(벧후 1:5-7). 이것들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증거로 인용한 “열매들” 중의 일부이다(8절). 바울과 예수님은 다르게 말하지만 동일한 사실은 그것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특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가운데 “죄에 대해 죽는” 것을 좁은 의미로 보려고 하는 유혹이 항상 있었다. 이것은 오랜 세대 동안 기독교인들이 죄죽임(mortification)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같은 세대의 기독교인들은 “살림(vivification)”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의로 사는 것이다. 잡초를 제거하고 심는 것이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데 필요한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삶을 계발하려면 죄에 대해 죽는 것과 의에 대해 사는 것 이 두 가지가 본질적인 요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