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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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그리스도와의 연합” 의 세 번째 글입니다.

죽음의 시간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노인으로서가 아니라 죄가 없음에도 죽음을 선고받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당신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확실히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몽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들에게 위안과 안심을 줄 수 있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당신은 마음을 열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자세는 틀림없이 칭찬받을 만하다. 물론 이것은 더없이 인간적인 본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다락방 강화(the Upper Room Discourse)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것이 예수님이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요 13-17).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24시간 안에 주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절묘하게 표현하셨다. 그분은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일어나 하인의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다(분명히 가롯 유다를 포함하여, 요 13:3~5,21~30). 그것은 요한이 설명하는 것처럼 행해진 비유였다. 즉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

그분은 또한 그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하지만 예수님은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깊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고전 2: 10). 그분이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었을 때, 그분은 베드로에게 “이후에” 이런 행동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요 13:7).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내적 본성을 계시하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 즉 삼위일체이시다.

드러나는 신비의 영광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비실제적이고 사변적인 교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사변적이거나 비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정반대이다. 삼위일체는 복음의 기초이다. 성부의 사랑, 성자의 오심, 성령의 중생 하게 하는 권능이 없다면 단순히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유니테리언 주의자들(일신론자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속죄할 수 없다.) 

성부의 사랑, 성자의 오심, 성령의 중생하게 하는 힘이 없다면 단순히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고별 담화 동안 예수님은 빌립에게 자신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 13: 8-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자신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요14,6). 그는 또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 안에” 있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런 상호 내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즉 우리의 이해 능력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것은 믿을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 유대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자기 아들(아버지 “안에” 있는)을 보내셨다. 이것이 믿는 자들을 위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믿는 자들을 그들의 거처로 삼으실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 신자에게 내주하신다(14:23).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16:14). 그분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 즉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것을 취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나중에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아주 훌륭하게 지탱해 주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씀하신다. 즉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 17:21).

이것은 사실 심오한 신학이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술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진술이다. 아이가 그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단순해 보인다. 어떤 단어가 “안”보다 더 간단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또한 너무 심오해서 최고의 지성도 이것을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성부의 한 위격을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성자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아버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가 없는 이런 아들을 생각할 수도 없다(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 없는 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단지 성령께서 우리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에게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서 아들을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에 우리 마음은 일체성 안에서 이런 삼위성을 기뻐한다. 하지만 삼위성 안에 이런 일체성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이것만큼 놀라운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계시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이것이 삶을 가장 잘 안정되게 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고, 심지어 기쁨을 주는 복음 진리라고 가르치신다(15:11).

삼위일체는 매우 중요하다. 삼위일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집어 삼키는 슬픔으로 위기에 몰린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피조물보다 영광에서 더 위대하고, 신비에서 더 깊으며, 조화에서 더 아름답다. 어떤 비극도 삼위 하나님을 압도할 정도로 크지 않다.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그분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보다 더 깊은 어둠은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개인 진술(Personal Narrative)』에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나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영광스럽게 보였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과 같이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경험한 가장 달콤한 기쁨과 즐거움은 나 자신의 선한 상태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광스러운 것들을 직접 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이런 달콤함을 누릴 때, 이것은 나를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생각 이상으로 나를 운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이것은 내게 참을 수 없는 손실인 것처럼 보인다. 즉 나는 나 자신 밖에 있는 이런 영광스러운 대상에서 눈을 떼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좋은 상태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계시는 사실 우리의 “선한 상태”와 관련이 있다.

드러난 연합의 경이로움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침의 요점은 단순히 우리 마음을 놀라게 하거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과의 연합이라는 놀라운 특권에 대한 이해를 주시기 위함이다.

사역을 시작하지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3:8). 그분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신다(14:20). 이것은 너무나 실재적이고 경이로운 연합이어서 ‘성령을 통한 성부와 성자의 연합’이란 표현으로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제자들은 성부와 연합하는 것을 즐기게 될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친교를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17절).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씀은 성령과 옛 언약(“너희와 함께”)과 새 언약의 신자(“너희 속에”)들 사이의 대조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 말씀은 종종 그렇게 이해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너희는 성령을 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 안에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나의 변함없는 동료였던 바로 그분으로서 너희 안에 계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오순절에).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성육신한 아들의 영의 내주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이다. 성부가 아들 “안에” 있는 것처럼 성육신한 아들 자신은 성부 “안에”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와의 교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적 본성이 신자들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내주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영적이고 인격적이다. 

그럼 이런 연합의 아름다움과 친밀함을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이 묘사하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에 주목하라. 즉 이것은 다름 아닌 성부와 성자가 신자의 마음 안에 그들이 거할 처소를 만드는 것과 관련된다(23절).

의미심장하게도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일이 아니라 단지 믿고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의 실체가 현실화되기 때문이다(“그날에는 너희가 알리라”; 20절).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믿는 자의 사고, 느낌, 의지, 사랑, 결과적으로 행동을 변화시킨다. 이런 연합에서 성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신다(15:2). 이 같은 연합에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모든 자를 지키신다(17:12).

존 던(John Donne)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던 것은 당연하다.

내 가슴을 쳐부수소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여태껏 두드리고, 호흡하고, 비추고, 나를 고치려고만 하셨으니; 내가 일어나서 서도록, 나를 뒤엎으시고, 당신의 힘을 쏟아 나를 깨뜨리고, 불고, 불태워서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나는 다른 자에게 넘기려는 강탈당한 도시처럼, 당신을 받아들이려고 애쓰지만 오! 헛된 일일 뿐입니다. 이성,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총독, 나를 방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포로가 되어, 약하거나 진실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여전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또한 사랑을 엄청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적과 약혼했습니다. 나를 이혼 시켜주거나 그 매듭을 다시 풀거나 끊어주세요. 나를 당신에게 데려가 주시고 나를 구속해주세요. 나는 당신이 잡지 않으면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겁탈하지 않으면 결코 순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Holy Sonnets XIV)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강사진이며 리폼드 신학교 조직 신학 석좌 교수이다. 그는 Maturity를 포함한 다양한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