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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긍휼과 성소수자의 결혼식


탕자의 비유에 담긴 참된 긍휼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가장 사랑받는 비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 비유는 많은 이들의 우려와 경험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방황하는 자녀나 친구를 둔 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알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탕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탕자처럼 죄에서 돌이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향할 때, 그분은 우리를 마지못해 용서하시거나 남은 음식만 겨우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축하 잔치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또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형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회개한 죄인들을 용서하셨는데도 그들에게 분개하며 멸시하면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때때로 형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이 비유는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반응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을 놓치기 십상이다. 형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는 선하고 합당한 소원은 쉽게 감정에 휘말리게 하여 우리의 이성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우리의 긍휼이 성경적으로 일관되고 하나님의 전 계획의 불변하는 진리에 확고히 기초를 둔 긍휼이 아닐 경우에는 말이다. 

탕자의 비유가 하나님의 참된 긍휼, 곧 죄인을 향한 성경적 긍휼에 관해 가르치는 바를 이해하려면 먼저 누가복음 15장 1~10절에 나오는 직접적인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양(누가복음 15:4~7), 잃어버린 동전(누가복음 15:8~10), 잃어버린 아들(누가복음 15:11~32) 등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일련의 비유 중 세 번째로 나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불평하자(누가복음 15:1~2)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7절과 10절에서 회개로 인한 하늘의 기쁨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나오는 목자의 행동과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에 나오는 여자의 행동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한때 죄 가운데서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서 돌이키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들을 영접하시고 기뻐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과 돌보심에 대해 가르치고 계신다. 하나님은 목자와 여자가 잃어버린 양과 동전을 찾기 위해 모든 일을 중단한 것처럼, 그분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구출하고 그들을 양 우리로 데려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실 것이다(누가복음 15:3~10). 하나님은 사람들이 회개할 때 기뻐하시며(눅 15:7, 10),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한다(롬 2: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불평은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심각한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은 덜 가증스러운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 비해 따뜻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축하와 환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만난다. 둘째 아들은 여호와께 큰 죄를 지은 자들의 표상이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설상가상으로 그 아들은 유산을 받은 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나 먼 나라로 도망하였고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낭비해 버렸다(눅 15:13). 그는 돈이 다 떨어지자, 돼지를 치러 가야 할 만큼 몰락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돼지 주변에 가지 않았다. 돼지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부정해지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누가복음 15:11~16).

결국, 둘째 아들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죄와 상황에 대해 통회하고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회개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가 자신을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종으로 받아주실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그에게 가장 좋은 옷과 반지를 끼워주고 가장 값비싼 음식을 먹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귀향을 축하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누가복음 15:17~24). 이 비유의 교훈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너무나 풍성해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오는 것을 한없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R.C. 스프로울 박사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버지를 욕되게 한 이 아들이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이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달려가 당신을 안으시고 입맞추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조심히 살펴보면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먼 나라로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칭찬하지 않았으며, 아들의 죄악된 행위를 위해 자금을 지원하지도 않는다. 아들은 반항하여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고, 아버지는 긍휼한 마음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과 함께 먼 나라로 가지 않고,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현관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누가복음 15:20).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다고 말한다. 이 측은함이 회개한 아들을 받아들일 준비였다. 아들의 심각한 죄를 격려하고, 묵인하고, 축하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려면(엡 5:1)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는 회개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죄를 격려하거나 묵인하고 축하하고 지원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들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용하려는 마음이 그들의 죄된 태도와 생활 방식을 긍정하고 포용하거나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죄를 용인하는 것은 안 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둘째 아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맏아들의 반응이다. 형은 상속 재산을 일찍 달라고 주장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이 자기처럼 신실한 아들이 받아야 할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환영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다고 비난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은, 그들의 태도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외적인 경건으로 가린 것임을 보여주려 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형의 마음이 올바른 곳에 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형은 동생이 없는 동안에도, 그리고 돌아온 뒤에도 아버지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았다. 아버지가 회개한 아들을 영접한다고 해서 맏아들이 손해보는 것은 아니다(누가복음 15:25~32). 교훈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풍성해서, 더 신실해 보이는 사람들이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고도 타락한 죄인들을 영접하기에 충분하다(마 20:1~16 참조). 맏아들이 회개에 대해 이해하고 아버지를 잘 알았다면 회개에 대해 축하로 반응했을 것이다. 따라서 형의 반응은 그가 아버지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맏아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극악한 죄인이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도 축하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형의 문제는 동생의 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형이 동생의 죄를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반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형이 죄를 용인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형의 문제는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맞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참된 긍휼

위의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해석을 보면, 하나님은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잃어버린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잃어버린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그분의 자비와 의에 기초한다.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각자의 길을 가도록 허락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죄에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죄를 용인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지만, 결코 그들의 죄를 격려하거나 칭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 대한 참된 긍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셨지만, 그들에게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대하실 때 자비와 공의, 관계와 의가 타협 없이 함께 존재하며,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빛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뻐하셨지만, 그들의 죄에 참여하거나 묵인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를 용인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암묵적인 용인까지도 절대 허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와 함께 식사하셨다. 당시 세리들은 납세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예수님은 레위가 회개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좇은 후에야 레위와 함께 식사하신 것이다(눅 5:27~32). 예수님은 죄인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여인의 경배를 받으셨다.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예수님을 경배한 것이 아니었다(누가복음 7:36~50). 또 다른 세리였던 삭개오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도 그의 죄를 용인한 것이 아니라 삭개오가 회개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주신 것이다. 우리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꺼이 하려는 의지와 나중에 자신이 착취한 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결심에서 그의 회개를 보게 된다(누가복음 19:1~10).

예수님은 가장 가혹한 심판의 말씀을 던졌던 바리새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거부하지 않으셨고 그와 기꺼이 대화를 나누셨다(요 3:1~15).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성경 외의 전통을 지킬 것을 요구했을 때는 그들의 관행을 신경 쓰지 않으셨다. 그들의 관행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막 7:1~13). 예수님께서 그러한 압력에 굴복하셨다면 그것은 죄를 용인하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마 15:1~19).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넘어서거나 그와 반대되는 인간이 만든 전통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그러한 전통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엡 5:11)에 참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잠 24:21 참조)이었다.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는 죄에 가담하지도, 용인하지도, 묵인하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다. 또한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사람들이 놀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를 비방할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2:14~16).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살전 5:22). 우리는 묵인하는 식으로라도 죄에 굴복하라는 엄청난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굳게 서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잠 1:8~10; 고전 16:13).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대하실 때 자비와 공의, 관계와 의가 타협 없이 함께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죄를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은 절대 없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시며(골 1:15) 하나님의 성품이 성육신 되어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이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요 3:16).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죄인은 회개한 죄인이지 말이나 행동으로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는 자들이 아니다(사 5:20). 예수님은 회개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시지만, 또한 모든 악을 이기시고(계 5:6~10; 17:14) 속된 것, 가증한 것, 거짓된 것을 결코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계 21:27) 승리하신 어린 양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고전 14:33).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로 죄를 묵인하지 않으신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는지 아닌지, 우리와 화평을 누리기 위해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해 혼란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주권적으로 우리가 그분과 화평을 누리도록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게 하시는(엡 2:8~10)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게 된다(요일 1:5~7).

참된 긍휼과 성소수자들의 결혼식

위의 내용은 많은 이들이 실제로 직면하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성애 커플이나 트랜스젠더 커플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결혼하는 부부에게 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그것이 죄라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도 그런 의식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적 성 윤리에 관해 커플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선물도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런 의식에 참석해도 된다는 의견들은, 이 복잡한 질문에 대해 모호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비판적이고 바리새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스도인이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은 긍휼을 베푸는 대신 정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모호한 대답이 필요 없다.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인이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참된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창조 과정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 결합으로 결혼을 제정하셨다(창 2:24~25). 그리고 결혼식은 증인들 앞에서 이 결합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이루어진 언약적 연합의 증인이자 승인자이다.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목적은, 맺어진 결혼 서약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증인들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 결합이 바람직하며, 하나님의 불변하고 권위 있는 말씀의 분명한 규정에 부합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증인들이 결혼을 승인하고 부부가 서약에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인은 단순히 부부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기 위해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신실한 목회자들은 결혼식 주례를 할 때 신랑, 신부와 참석자들에게 결혼식 서약의 증인들이 있어야 하는 목적과 의미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많은 전통 결혼식에서, 이 결혼을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례자가 참석자들에게 이 결혼에 반대하는 적법한 이유가 있는 경우, 합당한 이의를 제기하도록 요청하는 이유이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 연합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합법적인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참석자가 커플에게 미리 성소수자의 생활 방식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의 참석 여부이다.

로마서 1장에는 동성애와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을 거부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극악한 죄라고 말한다. 이는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도 부인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만들어졌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물론 이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다. 죄에서 돌이켜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다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자연 질서를 위협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그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을 위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합을 축하하기 위해 “결혼식”을 행하는 것은 위협적인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위협성을 더욱 극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라도 그러한 행사에 참석해서는 안 되며, 그런 커플에게 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선물을 사주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비성경적이고 죄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긍휼을 베푸는 일이며, 이로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이들과의 관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된 긍휼은 죄를 용인하지 않으며, 죄를 용인하는 듯한 빌미 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저주의 근거가 되는 죄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축하해 주는 것은 결코 긍휼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러한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큰 사랑의 행위이다. 이는 타협이 요구될 때도 응하지 않음으로 우리가 무엇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꺼이 보여주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마 22:34~38). 이웃에 대한 올바른 사랑(마 22:39~40)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란, 죄와 죄를 용인하는 행위에 대한 미움을 의미한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죄에 참여하고, 축하하고, 묵인하는 것은 하나님 보다 그 관계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질 만큼 존귀하고 영광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우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커플을 향한 미움의 행위가 된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에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할 더 많은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며, 결국 그들이 지옥으로 한 걸음 더 내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에게 거절당할 위험을 감수할 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원한 소망을 잃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성소수자의 결혼식 참석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 커플과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피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자주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과 대화하셨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삶에 관여하고 그들과 복음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다. 예를 들어 생일 파티는 죄인들의 연합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파티를 주최하는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므로, 성소수자의 생활 방식을 택한 사람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졸업식, 퇴직 축하 등의 행사들도 죄인들의 연합을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식사는 함께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 죄를 용인하거나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한 사랑과 친절을 베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과 절대 사귀지 말라 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고전 5:10). 오히려 그는 기꺼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고전 9:22)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어둠의 일에 참여하거나 타협하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에베소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명령은 죄를 축하하고, 옹호하고, 용인하는 특정 행사와 단체의 초대를 거절할 것을 요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원칙을 따랐으며 우리가 따라야 할 신실함의 고귀한 모범이 되었다. 성소수자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 제빵사, 꽃집 주인,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이들이 생계를 잃고 법원으로 끌려다녀야 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께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 악하다고 불렸다.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고 심지어 옳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의식에 참여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 이것은 거의 모든 공개 행사에서 진행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참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반사회적이라고 낙인찍혔다. 게다가 이 행사에는 상거래 조합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했다. 동료들에게 이런 행사를 용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서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의 참석은 우상 숭배와 마귀 숭배를 용인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금해야 했다(고전 10:1~22). 우리 시대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짓을 선포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말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기껏해야 하나님께서 이 결혼을 용인하기도 하시고 그렇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그것은 긍휼의 행위가 아니다. 참된 긍휼에 반대되는 거짓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한 거짓을 거부함으로 우리는 매도 당하고 미움받고 비판받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다. 세례 요한은 불법적인 결혼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참수형을 당했다(막 6:14~29). 우리는 목숨까지 잃지 않을지는 몰라도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 때문에 반드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께 신실하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22; 눅 21:17; 요 15:19; 17:14). 우리는 건전한 분별력을 행사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들의 죄를 묵인하거나 함께 축하해주는 것이라고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고(엡 5:10) 이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의 회개를 원하지 않고, 죄인이 회개했을 때 함께 축하해주기를 거부하는 맏아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한다. 아버지는 작은아들과 함께 먼 나라로 함께 가지 않았지만 언제나 죄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소수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선물하는 것은, 이 연합에 대한 다른 참석자들의 승인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리스도인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와 교류할 때 가장 친절하고 긍휼이 많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충성은, 심각한 죄에 빠진 것을 축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위해 제정하신 제도를 조롱하는 축하 행사에 참석하거나 이를 용인할 수 없다. 우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청첩장을 거절해야 한다. 그 사람은 그것을 증오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관계를 끊으려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삶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할 수 있지만, 사회의 압력이나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압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에 참여할 수는 없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긍휼과 정죄가 아니다. 우리의 선택은 긍휼과 타협 중 하나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참된 사랑과 긍휼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다. 긍휼이라는 이름의 타협은 역사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가 교회에 스며들었던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진리에 근거하여 진리에 따라 일관적으로 입증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 표현되는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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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니어 미니스트리 (Ligonier 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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