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차매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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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고뇌와 황홀감: 1세기 그리스도 행전”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성경의 첫 단어들인 이 다섯 단어는 세속적 자연주의자들의 귀를 울리는 나팔 소리와 같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살아가는 자녀들을 숨막히게 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의 구속 역사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 이 세가지 진리는 다음과 같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역사는 시간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우주 창조는 모든 형태의 자연주의와 충돌하는 최고 분쟁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지만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나는 세 번째 요점, 즉 우주는 시간에서 시작되었다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우리의 관심을 성경의 처음 다섯 단어에서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세 단어로 축소해 보자. 

기독교와 자연주의의 갈등에서 “빅뱅” 우주론의 인기는 우주가 시간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합의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모든 에너지와 물질이 압축된 극미한 “특이점”에서 폭발한 빅뱅은 120~170억 년(대략 10억 년) 전에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론의 표면 이면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숨어있다. 즉 영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무언가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그런 폭발보다 먼저 존재했던 물질과 에너지보다 앞서 존재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일부 자연주의자들은 빅뱅을 엄밀한 의미의 시작 그 자체에 관해 실제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시작이 없는 실재의 형태와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로 설명한다.

고대 세계에서 인류의 시작에 대한 히브리적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특별히 받아들인(하지만 배타적이지 않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이론은 순환적 견해였다. 이 관점에서 역사는 직선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다. 오히려 역사는 끝없는 원을 그리며 돌고 돈다. 어떤 발생 지점이나 특정 목적지가 없다. 이것은 종종 역사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 도식으로 간주된다. 전도서는 이런 비관적인 견해를 탐구하고 반박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며 해가 지고 뜨지만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역사관을 묘사한다.

특정한 출발점과 미래 완성이 있는 직선적-진보적 역사의 유대-기독교적 관점은 이런 순환적 역사 이론에 반대한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와 자연주의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비평적인 성경 해석 이론에도 중요하다. 

신학에 대한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신영지주의적 접근 방식은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견해였다. 그는 성경에서 역사와 신화를 구별했다. 그는 자연주의적 틀에서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기적적인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적은 역사적 진실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벗겨내야 하는 신화적 껍데기였다. 성경이 역사 비슷한 이야기 안에 신화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불트만의 믿음에 대한 이해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무시간적 신학을 구성하려고 애썼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역사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은 “초시간적(surpa-temporal)”이거나 “시간을 초월한(trans-temporal)”것이다. 초시간적(supra) 또는 초월적(trans) 영역은 역사 위에 있어서 역사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불트만은 역사의 수평적 차원이 아닌 수직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 기초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구원을 주장했다. 이런 도식에서 성경의 역사적 내용이 사실적 의미에서 참일 필요는 없다. 결국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위스의 성경학자이자 역사가인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성경적 기독교에 관한 이런 급진적인 위반에 반대하여 글을 썼다. 쿨만은 성경의 시간 기준을 조사함으로써 성경적 기독교는 성경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역사에 대한 히브리적 – 기독교적 관점은 유대-기독교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는 역사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며 그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역사적 맥락에서 제거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철학적 비평에서 성경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자연주의에 성경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적 자연주의라는 말은  모순어법이다. 

쿨만(Cullmann)은 “시간”에 해당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인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사이의 차이점을 언급했다.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의 정상적인 매 순간 경과, 즉 “연대순으로 기록된” 정상적인 역사를 의미한다. 카이로스(Kairos)는 특별히 중요한 특정 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틱한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중요성을 규정한다. 우리는 이 구별을 ‘역사적인(Historical)’과 ‘역사적으로 중요한(Historical)’이라는 영어 단어로 구별한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역사적이지만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든 것은 또한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카이로틱한 순간은 시간을 벗어난 순간이 아니다. 그것들은 크로노스의 맥락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때가 차매”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그런 카이로틱한 순간을 준비하는 가운데 역사를 다스리셨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실제 역사에서 발생했다. 기독교는 그런 실제 역사와 함께 일어서거나 넘어진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R.C.스프로울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창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Sanford)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초대 설교 및 강도 목사였고,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는 을 포함하여 백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