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와 권세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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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와 권세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고뇌와 황홀감: 1세기 그리스도 행전”의 첫 번째 글입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생겼을지 궁금할 것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팔레스타인 고향 땅으로 되돌아간 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들은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히브리어로 말하고 글을 썼다. 신약성경으로 한 장만 더 넘기면,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동일한 민족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민족은 페르시아 제국이 아닌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쓰고 말한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간 속에서, 문명의 중심지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변화들을 공부한다면, 1세기 초대 교회가 세워진 시대상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헬라어와 헬라 사상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의 계승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5년부터, 그리스를 시작으로 페르시아령에 있던 아시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군사작전은 지중해 동쪽 끝까지 이어졌고, 아수스 전투에서는 페르시아를 격파하여 마침내 두로와 가자 지역을 포위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당도했다고 기록한다. 알렉산더는 대제사장들을 존중했고, 이들의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 페르시아를 무찌르게 해줬다고 믿었다. 헬라인이 페르시아 왕국을 무너트린다는 다니엘의 예언을 들은 알렉산더는 자신이 바로 그 예언의 성취자라고 믿으며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통치의 결과가 유대인들에게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11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헬라 문화를 온 세상에 알렸지만, 정작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지는 못했다. 기원전 323년, 33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은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거대한 왕국을 후계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알렉산더가 쌓아 올린 두 개의 왕조, 이집트의 프롤레미와 시리아 및 아시아 지역의 셀루커스 사이에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지역 내 갈등에 더해, 유대인에게 그리스의 방식(헬레니즘화)을 수용하라는 문화적, 정치적 압박이 가해졌다. 셀루커스의 왕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98년에 프롤레미 왕조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복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는 열정적으로 헬레니즘화에 박차를 가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오코스가 충격적인 방법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다고 기록한다. 안티오코스는 성전에서 제우스를 예배했고, 지성소에서는 그리스의 다른 신들을 위해 돼지를 제물로 올렸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필수적인 할례와 다른 종교 행위들을 금지했으며, 심지어는 유대인의 성경까지 불살랐다. 그렇게 유일신 사상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및 그리스인 사이의 적대감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적대감은 로마 시대까지 이어지며, 우리가 살펴보려는 1세기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유대인은 신념을 저버리고, 안티오코스 4세의 강압적인 헬레니즘화를 따라갔다. 물론 일부는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애국심에 불타있던 유대 반란군들은 마카비우스의 지휘 아래 항전했다. 유다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고 셀루커스 세력을 축출했다. 유다는 새로운 독립 왕국인 (조상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니안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유다는 헬라인이 모독한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야훼의 이름으로 성전 등불을 재점화했다. 이후로 이 사건을 유대인의 수전절(또는 “빛”이라는 의미의 하누카)로 기념한다. 몇 해 후에 예수님 또한 예루살렘에서 이날을 기념하셨다(요 10:22). 하누카는 아브라함과 예수의 종교와 헬라-로마의 이념 사이의 적대감을 내포하며 1세기 교회의 문화적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의 모든 이목을 수사 지역에서 그리스가 위치한 서쪽으로 옮겨 놓았다. 이 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가 있는 서방으로 더욱 움직여 갔다. 알렉산더의 통치기간 동안, 로마는 모든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대의 다른 통치자들과는 달리, 로마는 패전국들을 노예가 아닌 연합국으로 흡수했다. 카르타고와의 전투 이후 로마는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까지 지배했다(기원전 241~238). 로마인들은 이런 원거리 통치 지역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책략을 세우는데, 이는 특별 관료를 임명하여 특정 관할을 통치할 수 있도록 “지방부”를 구성한 것이다.

기원전 63년, 유대 땅은 시리아 총독부의 일부로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인다. 그때까지 로마군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 카르타고 군대를, 그리스에서는 마게도니아군을 무찌르며 지중해를 라틴호로 만들어버렸다. 기원전 67년부터 기원전 62년까지는 폼페이 대왕이 시리아와 아시아를 더욱 압박했다.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에 의하면, 폼페이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통치자의 특권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고 한다. 짐작하건대, 그는 로마의 우수한 신들에 의해 짓밟힌 유대인의 연약한 신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식민지의 다른 신들도 수용했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유대인들 및 그리스도인들과 군주들 사이에 갈등 관계를 불러일으켰다.

로마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독특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로마는 하스모니안과 헤롯 왕조를 통해 유대를 지배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유대인들 안에는 반항심이 들끓고 있었다. 불안정한 상황을 감지한 로마는 유대를 단독적인 지방 구역으로 편성하고, 기원후 6년이 되어서는 지방 행정부의 우두머리가 자체적으로 승계되는 것까지 승인했다. 

3세대 통치자인 본디오 빌라도(기원후 26~32년)는 그의 선조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갈피를 못 잡았다. 헤롯 왕조는 헤롯 대왕(기원전 37~4년) 시대에 광대한 영역을 다스렸다. 헤롯에 이어, 그의 아들 빌립이 북쪽 지역을(기원전 4년~기원후 34년), 또 다른 아들이자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헤롯 안디바가 남쪽 지역을 통치했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빌립이 죽고 나서 그의 영토는 시리아 지역과 합병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기원후 37년에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그 지역을 시리아에서 그대로 떼어내, 헤롯과 빌립의 조카인 아그립바 1세(37~44)에게 수여한다. 칼리굴라는 아그립바의 영토를 헤롯 대왕이 수복한 영토만큼 확장해 주었으며, 그에게 “왕”이라는 직함까지 내렸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초창기 역사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로마 제국은 내란으로 들끓었다. 로마 원로원보다 군사력을 지닌 개인들이 더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들이 지도하는 부대는 로마 제국보다는 그들의 장군들에게 충성했다. 마리우스가 술라와 전쟁을 벌였을 때, 로마 군대는 실상 로마시를 향해 진격했다. 가이사 역시 가울에 있던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폼페이가 있는 로마로 진군했다. 마침내, 마크 안토니와 그의 연인이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패배를 맞았다. 모든 사태가 진정되고,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기원전 27년, 원로회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리고, 로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안정을 이뤄갔다. 도로가 건설되었고, 안전이 보장되었다. 항해 운송은 해적들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재판은 (고대 사회의 기준에서)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집행되었다. 로마는 아름다움을 뽐냈으며, 당대의 시인 호라스와 버질은 평화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유대 땅에서는 구원자가 태어났다.

많은 유대인은 헤롯 왕조와 로마의 통치를 경멸했고, 자신들을 대적의 손아귀에서 구원해줄 야훼를 기다렸다. 그중 일부는 열심당원과 같은 극단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구약의 사사들이 주변 대적국과 맞서고 유다 마카비우스가 셀레키우스에게 대항하듯, 자신을 무장하여 로마에 대항했다.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세리들은 배반자로 간주되었다. 

교회의 시작이 유대인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구원은 유대인에게 남이니라(요 4:22)”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예수님 본인도 유대인이었으며, 그분의 첫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이었다. 교회는 선조 아브라함에게 선포된 복음 위에 세워졌다(갈 3:7~9, 엡 2:11~13). 그러한 이유로, 1세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주의에서 형성된 하나의 분파라는 인식이 외지인들에게 심어졌다.

역설적으로, 1세기 기독교에 가장 공격적인 적대심을 보인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주의에 붙여진 모든 오명이 기독교에 따라왔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혐오스러움으로 인해 미움”을 받았으며, 그들의 사상은 가장 악독한 미신이라고 선언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대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며 기독교 혐오주의를 조장했다. 

1세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히브리 선조들처럼 멸시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은 로마법이라는 하나의 법 아래 놓여있었다. 세상은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도로와 항해의 길은 안전했다. 그리스도가 오시어 그분의 복음이 전달된 세상은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 나라의 흥망을 주관하시는 그분에 의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크리스 슐렉트
크리스 슐렉트
크리스 슐렉트(Chris Schlect)는 뉴 세인트 앤드류 대학의 역사 교수이며, 아이다호주 모스코에 있는 크라이스트 교회의 장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