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하라!
2022년 10월 12일1세기 교회라고요?
2022년 10월 15일생명의 피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고뇌와 황홀감: 1세기 그리스도 행전”의 네 번째 글입니다.
성경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말한다(시 63:3).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서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순교자였다. 그들은 가장 깊은 고난의 잔을 마셨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루마니아 선교회의 조셉 쪈(Joseph Tson)은 “기독교의 창시자가 순교자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라고 말했다. 실제로 “증인”을 의미하는 “순교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믿음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1세기 교회(오늘날과 같이)에서 충실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종종 죽음을 의미했다. 스데반은 충실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다(행 7:59). 후에 헤롯이 칼로 야고보를 죽였는데 그는 칼로 죽임을 당한 첫 사도가 되었다(행 12:2). 전승에 따르면 요한을 제외하고 바울, 베드로, 다른 모든 사도는 죽임을 당했으며 다른 많은 일반 성도들 또한 순교를 당했다.
그런 후에 신약 시대가 끝나갈 무렵, 사도 요한은 하늘 환상 가운데 제단 아래에서 순교한 자들의 영혼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자신의 승리를 보여주시고 그들을 신원해 주실 것을 요구했다(계 6:10). 이것은 틀림없이 살아 있는 성도들도 궁금해 했을 중요한 사실이다.
요한계시록 6: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은 놀랍다. 하나님은 순교한 성도들에게 그들처럼 죽임을 당할 그들의 동무들과 형제들의 수가 차기까지 잠깐 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진 분명한 함의는 다음과 같다. 주님이 명하신 많은 순교자가 있고 그것이 완성되기 까지 그 수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너희와 같이 죽을 사람이 다 차기까지 쉬라”고 말씀하신다.
순교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허를 찌르는 것도 아니다. 또 순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대의가 전략적으로 패배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순교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전략가도 상상하거나 설계할 수 없는 하늘에 있는 계획의 일부이다.
스데반의 죽음은 틀림없이 예루살렘 교회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가장 뛰어난 대변인을 죽게 내버려 두셨지만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핍박은 교회가 더 멀리 흩어져 선교 사역을 하도록 했다(행 8:1, 4). 마찬가지로 야고보의 죽음 또한 분명히 지역 사회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기초인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잔인하게 죽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도 같은 운명이 닥치자 큰 기도가 부어졌다(행 12:5). 후에 로마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죽음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이 두 명의 지도자가 한 번의 박해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면 그들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움과 의문을 품게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흔들렸지만 또한 많은 사람은 굳건하게 남아있었다. 이렇게 3세기 동안 기독교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토양에서 성장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약 주후 98년)까지 박해는 허용되었지만 합법적이지 않았다. 트라야누스에서 데키우스까지(약 주후 250년) 박해는 합법적이었으나 주로 지역적으로 발생했다.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개혁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던 데키우스로부터 311년 첫 번째 관용령까지 박해는 합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한 필자는 이 세 번째 기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공포가 모든 곳의 회중에게 퍼졌다. 또한 랍시(위협 당했을 때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의 수는 … 엄청났다. 하지만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고,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순교하는 사람들 또한 넘쳐났다. 박해가 더 광범위하고 강렬해짐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열정과 저항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샤프-헤르조그 기독교 백과사전(Schaff-Herzog Encyclopedia, Vol. 1).
225년에 사망한 신앙의 변증자 터툴리안(Tertullian)은 적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당신들에 의해 베어질 때마다 우리는 많이 증가합니다. 기독교인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변증 Apologeticus, 50). 또한 제롬은 약 100년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른 사람의 피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피에 의해 세워졌다. 분노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인내함으로써 세워졌다. 박해는 교회를 성장하게 했다. 순교는 교회를 영예롭게 했다”(서신 82).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소유물과 가족에 대한 엄청난 위협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험의 절정은 순교였다. 하지만 그 순교 위에 “정해진 수가 있다”고 말씀하신 주권적인 하나님이 계셨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순교자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사탄의 입을 막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더 나은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늘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 성가대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순교자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고귀한 군대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빌 1:21).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가 생명, 사랑에 빠지는 것,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 그들의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 그들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 꿈의 배우자, 꿈의 집, 꿈의 유람선 여행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계획과 꿈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면 나의 꿈 가운데 끊어지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마음의 소원이라고 말하겠는가? 예수님을 이만큼 사랑하는가?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유익할 만큼 그분을 많이 사랑하는가(고후 5:8)?
당신은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