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하라!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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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라!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고뇌와 황홀감: 1세기 그리스도 행전”의 세 번째 글입니다.

예수님의 친구 두 명은 무거운 마음으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소망은 주님의 죽음과 함께 모두 내동댕이쳐졌다. 이런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로 인해 어떻게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 났는지 설명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환상이 깨진 그들의 절규를 들어보라. “우리는 소망했으나, 그는 죽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고 그들의 소망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경이롭고 명백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이다. 마음속에 담겨있던 그들의 꿈이 입에서 맴돌게 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메시아를 무덤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목에 걸린 멍에를 벗기시며, 불신앙적인 탄압자들을 그분의 땅에서 제거하실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제자들이 품고 있던 이스라엘 회복의 커다란 꿈은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작아 보이기만 했다. 제자들의 꿈은 그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역량 순위를 상향시키려는 보잘것없는 사고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추측하는 것 이상의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되새겨주셨다(마가복음 13장 32절에서도 이미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시야를 확장 시키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누가가 기록한 “행전”이 바로 이 약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의 행전은 단지 사도들의 약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누가의 복음서를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 1:1)” 행하신 일들의 기록으로 특징짓는다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계속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의 기록이다. 차이를 두자면, 사도행전에서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통치권을 복음 증거자들의 말에 담긴 성령의 능력을 통해 지상으로 확장하시어, 주님이자 그리스도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점이다. 

빛은 파동을 일으킨다. 조약돌이 수면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연못에 생기는 잔물결과 흡사하다. 초대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렸다. 성령이 역사하셨고, 교회는 성령의 첫 증거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긴 하지만, 그곳에 모인 청중들은 (민수기 28장 26절에 나오는 율법의 칠칠절을 성령 강림으로 연결한다면) 전 세계에서 모인 첫 열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가는 참석자들의 출신 국가 명단까지도 추가로 기록한다(행 2장 9~11절). 이는 바벨론까지 이르게 된 국가 목록(창 10)을 되새기며, 하나님 나라의 지리적, 인구적 원심 이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될수록, 사방에서 여러 민족이 몰려들었다. 120여 명의 교회는 하루아침에 삼천 명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그 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5천 명을 넘기게 된다(행 4:4).

이러한 수적 증가는 반대 세력뿐 아니라 관리적 과부하를 일으켰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고 시기하는 이스라엘 기득권 세력들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사도들을 위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대한 선포를 멈추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주님의 권위가 유대 지도자들을 압도했기에, 예수님의 증인들은 그들의 과업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5:29)”라고 담담히 고백했다. 

수적 증가와 그들의 다양한 언어는 헬라 언어권에 있는 과부들을 돌보는 데 지장을 주었다. 이는 교회 연합에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지도자의 권위를 분배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구제 사역을 총괄하는 일곱 명의 지혜롭고 믿을 만할 남자들(모두 헬라어 이름을 가졌으며, 한 명은 이방인 개종자였다)을 임명하였고, 이에 따라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 사역에 집중하게 됐다(행 6).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행 6:7), 그 말씀으로 교회가 성장해갔다(행 12:24, 19:20, 골 1:6).

하나님의 나라는, 스데반과 그의 동료들을 통해, 마치 파도처럼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와 사마리아에까지 넘쳐흘렀다. 그들의 목숨이 씨앗이 되어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곳곳으로 흩어지게 했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갔다(행 8:1).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성전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시며, 그 어느 곳에서든,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아브라함, 이집트의 요셉, 시내 산의 모세 때와 같이(행 7:2, 9, 30), 그분의 종들과 함께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며 가장 먼저 수문을 올렸다. 스데반은 그의 피로 자신의 증언을 확증했고, 죽음 앞에서 보여준 그의 평안으로 사울의 열의에 불을 붙였다(행 8:3). 

스데반의 동료 빌립은 사마리아 북쪽 지방(행 8:4~25)과 해변 지역(행 8:26~40)으로 이동했다. 빌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두 개 이상의 지역적 장벽이 무너졌다. 사마리아인들은 인종적으로는 혼혈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모세오경을 이방적 요소와 혼합한 융합 주의자들이었다(열왕기하 17:24~41). 그러나 빌립이 설교한 예수는 한 줄기의 빛처럼 미신과 마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빌립의 사역을 이어받아 사마리아 신자들을 성령 세례가 일어나는 교회 안으로 이끌어주었다(행 8:14~25).

두 번째 장벽은 더욱 높았다. 불가침적으로 보이는 유대인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 사이의 벽이었다(엡 2:14~15). 에티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담긴 귀중한 양피지 문서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다(행 8:26~39). 이 고관은 유대 종교로 개종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환관이자, 이방인이라는 두 가지의 이유로 그는 주님의 성전으로부터 배제됐다(신 23:1). 그러나 새로운 날이 열렸다. 하나님은 환관과 이방인 모두를 그분의 새 성전에서 환영하셨다. “외부인”을 그분의 은혜 안으로 맞이하신 것이다(사 56:3~8).

베드로는 빌립을 쫓아 서쪽 지역에서 해변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 욥바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정확한 때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자를 만난다(행 10~11). 유대인의 관점으로 고넬료는 신실한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할례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자가 아니었다(행 10:1~2,11:3). 그럼에도 보다 중요한 점은 고넬료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행 10:43). 바울이 설교를 하고 성령이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어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을 높였고, 믿음으로 죄사함 받았다(행 10:44,46). 은혜의 파도가 밀려와 단번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담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활기 넘치는 다인종 교회가 시리아의 대도시, 안디옥에서 성장하게 된다. 

이 시점에, 사울의 관심은 오로지 교회를 말살시키는 것뿐이었다(행 9:1~2).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계획이 있으셨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그가 핍박하던 주님의 영광에 타도되어, 눈이 멀게 된다. 그리고 주권적 은혜에 붙잡혀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행 9:15)” 전하게 된다. 사도행전 13~28장에서 우리는 사울(바울)이 이스라엘의 해안 지대부터 시저의 도읍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보게 된다. 

성령은 안디옥에 체류하던 바나바와 사울을 바다 건너편 연안으로 보내신다(사 42:4, 49:1). 그들은 구브로와 남부 중앙아시아의 섬들을 시작으로 선교 여행을 다닌다(행 13~14장). 사도들의 공의회가 하나님은 육체의 할례가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이방인들을 부르신다는 점을 단호히 확정한 후(행 15), 바울은 새로운 동행자인 실바와 함께 새 출발을 한다. 마치 하나님의 목양견과 같이, 예수님의 영은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들어가려는 바울과 실바를 제지하고, 그들을 에게해 서쪽으로 이끄셨다(행 16:6~8). 바울과 실바는 환상을 보고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입성하고, 복음을 유럽에 전파한다.

한때는 잔혹한 압제자였으나, 이제는 열성적인 복음의 옹호자가 된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성서와 성전 규례에 푹 빠지도록 영향을 끼쳤다(행 13:13~49). 이는 미신적 다신교(행 14:8~18)와 지적 우상 주의(행 17:16~38)라는 어두움을 향해 비추는 빛이 되었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종들을 위한 그분 자신의 종된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행 13:47).”

바울이 종국에는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땅끝에 위치한 로마에 당도한다. 바울이 그곳에 도착할 시점에 복음은 이미 로마에 뿌리내리고 있었고(행 28:15, 롬 1:8), 심지어 시저의 가정에까지 영향을 준다(빌 4:22). 누가의 마지막 기록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온종일을 가택 연금 상태로 체류했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제한 없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말한다(행 28:31). 바울은 얽매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딤후 2:9).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데니스 E. 존슨
데니스 E. 존슨
데니스 존슨 (Dennis Johnson) 박사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신학 명예 교수이자 테네시주 데이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의 부목사다. 저서로는 『예수님과 함께 말씀 따라 걷기』, 『어린양의 승리』, 『사도행전을 공부합시다』 등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