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칭의를 오해해 왔는가?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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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칭의를 오해해 왔는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N.T. 라이트는 뭐라고 말했나?의 여덟번째 글입니다.


“[칭의]는 ‘들어가는 것“(getting in), 아니 사실은 ‘들어가 있는 것’(staying in)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어떻게 누가 안에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표준적인 기독교 신학 용어로서 칭의는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에 관한 것이었고, 구원이 아니라 교회에 관한 것이었다.”

–N. T. 라이트,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원제: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19쪽.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칭의 교리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칭의는 근본적으로 죄인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칭의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갖고 있는 중대한 차이가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양측 다 성경이 칭의는 일차적으로 구원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이해해야 개신교-로마 가톨릭 사이의 논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저명한 신약학자이자 개신교 성직자인 한 사람이 로마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인 모두가 똑같이 성경적 칭의 견해를 심각하게 오해했다고 주장했을 때 나타난 충격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라. N. T. 라이트는 현재적인 칭의는 주로 누가 교회에 속한 자인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칭의는 일차적으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라이트는 칭의가 죄인의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는 교회가 성경이 칭의 교리의 핵심으로 말하는 것 곧 “누가 언약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122쪽)를 보지 못하고 놓쳤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자신의 입장이 교회 일치와 관련된 잠재 요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라이트는 만일 자신이 옳다면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 간의 큰 간격에 다리를 놓았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성경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믿는다. 특별히 바울의 갈라디아서가 그렇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주된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바울의 반대자인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행위를 더할 때(믿음+행위)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주의자들은 할례가 그리스도인 정체성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성원 자격의 표지는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할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표지가 아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논쟁이 “칭의”의 배경을 제공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갈 2:16) 것이라고 말할 때 바울은 사실 사람은 믿음의 표지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할례나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다른 행위의 표지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확실히 라이트는 그럴듯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더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심각한 문제점이 나타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주의해 보라.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행하는 일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면 우리는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갈 3:10. 그리고 신 27:26을 보라). 이 기준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갈 3:10. 갈 5:3도 보라).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왜냐하면 의로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이다(갈 3:11, 13). 칭의는 저주를 친히 감당한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된 것과 관련된 개념이다.

또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칭의를 어떻게 말하는지 주의해 보라. 죄인들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롬 3:20). 율법은 완전함을 요구한다(롬 2:13). 우리는 다 “죄 아래에” 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떤 죄인도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의 완전한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롬 3:9~10).

하나님은 오직 완전히 의로운 사람 곧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4-25, 롬 5:9도 보라). 우리는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의롭다고 선언된다(롬 5:19).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오직 믿음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공의의 온전한 만족을 기초로 할 때에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따라서 바울은 칭의를 근본적으로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칭의 교리는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으로 다룬다. 칭의 교리는 예수님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고 죄인들을 위하여 저주가 되신 분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라이트가 현재적인 칭의는 일차적으로 교회 구성원 자격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도 라이트의 견해로부터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 성경은 칭의는 신자들이 서로 결속하며 살도록 그들을 이끄는 강하고 힘 있는 유인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로마 지역의 교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킨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롬 14장을 보라). 바울은 교회의 연합을 어떻게 격려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주신 방식 — 자격 없는 죄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은혜가 나타난 것 –은 여러분이 교회 안의 동료 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특히 여러분이 그들과의 불가피한 충돌에 직면하게 될 때 더욱 그렇다. 결국 우리 각자의 차이에 자비로 반응하고, 서로의 상처를 사랑으로 싸매주는 것이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재는 최고의 시금석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가이 워터스
가이 워터스
가이 워터스(Guy Prentiss Waters) 박사는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의 James M. Baird Jr. 신약학 교수이자 미국장로교의 강도장로다. 그는 How Jesus Runs the Church 및 The Life and Theology of Paul 을 포함한 여러 책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