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는 복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율법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견해
2021년 12월 13일
교회는 칭의를 오해해 왔는가?
2021년 12월 13일
“율법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견해
2021년 12월 13일
교회는 칭의를 오해해 왔는가?
2021년 12월 13일

칭의는 복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N.T. 라이트는 뭐라고 말했나?의 일곱번째 글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 교리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뜻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 교리는 복음에 함축되어 있다. 복음이 선포되면 사람들은 믿음으로 나아오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하신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다.”

–N. T. 라이트,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원제: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32~133쪽.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기에는 상당히 그럴듯하다. 어쨌든 N. T. 라이트가 다른 곳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 교리’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이 말은 모두 루터가 하는 말처럼 들린다. 루터는 복음은 “완전히 우리 밖에” 있다고 확언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오랫 동안 갈망해 온 복음주의적 개인주의의 해독제이자 주관주의의 치료제인가? 라이트 주교와 다른 학자들은 그렇게 믿는 것이 분명하다. 라이트 박사는 다른 곳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큰 안도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그럴듯한 관점이 실재와 거의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라이트의 말은 초기 복음주의의 미숙한 신학적 가르침에서 벗어나기 위한 설명으로 보인다. 초기 복음주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러한 가르침이 그 어떤 심각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에 심각하게 의문이 든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라이트가 한 말이 외관상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라이트의 이 말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주 교묘한 말로 판명될 것이다. 그 가운데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복음에 의해 “함축되어” 있는 것이라는 관념 속에는 거짓 이분법이 들어 있다. 이 “양자택일” 사고방식은 ‘테르티움 논 다투르'(tertium non datur; 만약 A가 아니라면 그것은 반드시 B라는 논리)의 논리적 오류를 드러낸다. 곧 복음은 그리스도다, 아니면(OR) 복음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다.

이것은 그릇되게 그리스도에게서 칭의를 분리시키고, 또 베푸는 자(자신의 사역을 이룬 그리스도의 인격)에게서 그가 베푸는 유익(예수께서 하신 일이 함축하고 있는 사실)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친히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다(고전 1:30). 칭의는 마치 그리스도와 상관없거나 그리스도에게 덧붙여진 어떤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칭의를 가질 수 없다! 또한 칭의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가질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인 한,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둘째, 그리고 어쩌면 더 놀랍게도, N. T. 라이트의 폭넓은 로마서 주석에 따르면, 바울은 그가 “나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롬 2:16). 그러나 이 복음은 구원을 주는 능력(1:16~17)이고, 따라서 “구원받는 중에 있는 것”은 복음의 한 부분이다. 게다가 이 복음은 로마서 1~3장뿐만 아니라 로마서 4~16장도 포함한다. 더 적절하게 말하면 이 복음에는 로마서 12~16장이 포함된다. 전문 술어로서 복음은 케뤼그마(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디다케(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자와 신자 공동체의 삶에 적용하는 것)를 포함한다.

앞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왜곡시키고 변질시킨 복음에 구속의 적용이 포함된다고 믿었다.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 얻는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갈 3:13)만큼이나 당연히 복음의 한 부분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위에서 인용한 라이트의 말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교묘하게 속이는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복음이 선포되면 사람들은 믿음으로 나아오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하신다”는 라이트의 진술을 보면, “칭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진술에서 칭의는 “본질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는 용서받고 받아들여진다는 복음의 정의에 속해 있는 개념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은 바울의 헬라어 용어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가 “단절”의 반대 개념이었다면 논증이 더 그럴듯할 것이다. 그러나 “칭의”는 “정죄”의 반대 개념이다. 칭의의 일차적 의미는 범죄, 죄책, 형벌과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일차적으로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적 규범에 따라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은 칭의가 함축하고 있는 한 요소에 불과하다.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은 칭의의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복음 고백(고전 12:3)은 고린도전서 15:1~3에서 이에 대하여 주어진 해석–“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과 분리되어 이해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바울은 이것을 특별히 복음으로 부른다. 복음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서 제외되는 이유로서 우리의 죄, 오염, 죄책을 다룬다. 물론 칭의는 관계 용어다. 하지만 그 이유로 인해 그것이 갖는 법정 용어의 성질이 추호도 약화되지 않는다.

주관성이 복음의 객관성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또는 개인주의가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 하이델베르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복음과 칭의 이해는 모든 필요한 안전장치를 제공해준다. 오래 묵은 포도주가 가장 좋다.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일치해야 한다는 요구조건과 일깨워진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을 모두 만족시킨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강사진이며 리폼드 신학교 조직 신학 석좌 교수이다. 그는 Maturity를 포함한 다양한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