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의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의 “난센스”
2021년 12월 13일
구원과 내세의 삶
2021년 12월 13일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의 “난센스”
2021년 12월 13일
구원과 내세의 삶
2021년 12월 13일

그리스도, 우리의 의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N.T. 라이트는 뭐라고 말했나?의 열일곱 번째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을 아는 것은 어떤 사람이 대신해서 율법(토라)을 이룬 것을 아는 것보다 목회의 관점에서 볼 때 훨씬, 훨씬 더 중대하다.” 

–N. T. 라이트,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원제: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 233쪽. 

N. T. 라이트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옹호하고, “칭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이 세상과 맺으신 언약에 속해 있는 자인가?”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라이트는 “메시아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이 언약에 속해 있는 자라고 답변한다. 라이트의 이런 입장은 이번 달 <테이블톡>에서 광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나의 글의 주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신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개혁파의 성경관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최후의 심판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긍정적인 담보물로 전가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님이……값없이 의롭게 하신 자들은……그리스도의 순종과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이 그들에게 전가됨으로써……그들의 인격이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11장 1항). 

첫째, 이 입장은 로마서 4:3~24에서 명확히 제시된다. 이 본문의 중점은 ‘로기조마이’(장부의 대변에 기입하다, 어떤 사람의 정산에 포함시키다)라는 단어에 있다. 이 단어는 이 로마서 문맥에서 10회에 걸쳐 사용되고, 시편 106:31, 갈라디아서 3:6, 야고보서 2:23과 같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대변에 기입된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신자의 선행이 아니다(9~11절). 심지어는 신자의 믿음이나 공로도 아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한 구속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롬 3:24). 

  칭의의 결과는 아무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각 사람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존재로,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해야 한다(엡 2:5, 9). 

  둘째, 구원은 단순히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받은 복이라는 사실이 성경에서 매우 분명히 제시된다(요 5:24, 롬 8:1, 엡 2:5, 8, 요일 3:14). 

  미래의 구원에 대한 이 보증은 완전함을 기초로 하면 실제로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이 전가된 자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진다. 

  셋째, 스가랴 선지자는 스가랴 3:1~5에서 이것을 분명히 했다. 더러운 옷을 벗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속을 가리키는 은유다.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전가되는 것을 표상한다. 그런데 의의 전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나타나야 했을 것이다. 똑같은 개념이 혼인 잔치 비유에서도 발견된다(마 22:11~13).  

  이 전가 견해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반론이 제기된다. 

  ● “만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불법과 불충분한 순종을 제거하신다면 이것은 개인적 책임을 소멸시킬 것이다.”

  답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책임은 남아 있고 최종 심판의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겔 18:4, 25~29, 33:17~20). 그러나 특히 언약의 머리가 되는 분이 지체들 때문에 형벌을 받고(사 53:5~6, 11~12), 자신의 의로 자기가 대표하는 자들을 덮어줄 수 있는 집단적 책임의 어떤 요소들이 특히 언약적 연합 안에 존재한다. 이 대속은 과거의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이중의 효력을 갖고 있다.

  ●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신다면, 그들은 어떤 죄를 저질러도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답변. 바울 시대에 이미 제기된(롬 6:1, 15, 고전 15:32~33) 이 반론은 칭의를 졸렬하게 조롱하는 것이다. 벌 받지 않는 것만 획득하고 나서 우리 구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죽으신 것을 잊어버린다는 입장은 하나님이 곳곳에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죄를 짓는 문을 열어놓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믿음은 분명히 산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리라!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약 2:14~18)는 칭의 견해에 있어 다음과 같이 서로 일치한다. 

    바울: 죽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믿음은 자체로 죽은 것이다. 

    야고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갱신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 역시 죽은 것이다. 

  바울과 야고보 둘 다 구원은 선행을 낳는 믿음으로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 N. T. 라이트는 바울이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루지 않고 단순히 “교회는 할례를 구원의 필수 요소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고 역설한다. 

  답변. 사실 바울 서신의 많은 본문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인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쓰기 훨씬 이전인 주후 50년대 초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전체 교회에 의해 결정적인 답변이 주어짐으로써 확립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 문제가 잠잠해진 뒤에 로마서와 같은 논문을 그토록 길게 쓰면서 그가 요청해서 이루어진 교회의 답변(행 15장)을 참조하지 않고 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칭의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주어지는 것을 적절히 강조하는 복음 사역은 새 관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설교의 갱신을 필요로 한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로저 니콜
로저 니콜
로저 니콜(Roger Nicole)은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의 명예교수이자 《Standing Forth》의 저자다. 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인 그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