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의 “난센스”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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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의 “난센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N.T. 라이트는 뭐라고 말했나?의 열여섯 번째 글입니다.


“만약 우리가 법정 언어를 사용한다면, 재판장이 자신의 의를 원고나 피고에게 전가하거나 나누어주거나 이전시키거나 전달하거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옮긴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말이 안 된다. 의는 법정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물건, 물체 또는 기체가 아니다.”

–N. T. 라이트,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원제: What Saint Paul Really Said), 98쪽. 

하나님의 의를 피고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범주 오류로, “말이 안 된다”고 말하는 N. T. 라이트의 주장에는 최소한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너무 피상적으로 정의한다. 라이트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행하느냐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고, 공정하게 심판하고, 죄를 적절하게 처리하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를 옹호하시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의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의가 행하는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지면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깊이 다루지는 못하겠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책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충실한 이해로 생각되는 것을 간략히 요약하면, 하나님의 의의 본질은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변함없는 신실함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변함없는 신실함인 것이다.

라이트가 법정에서 재판장의 의는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고, 피고의 의는 “그가 옳다고 선언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라이트의 관점은 이 다양한 표현들의 배후에 놓여있는 의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라이트는 역사적 전가 개념을 “전혀 말이 안 되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가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니고, 라이트가 설정해 놓는 설명 방식은 전가가 난센스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더 깊은 하나님의 의의 속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단순히 재판장의 행동에 따라 다루기 때문이다.

라이트가 제시하는 법정 심상의 두 번째 문제점은 재판장이 전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장이 전지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피고가 라이트가 인정하는 의와 다른 의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말하자면 재판장의 전지성 때문에 피고는 무죄나 유죄와 상관없이 단순한 무죄 판결을 받는 법적 신분 이상의 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피고에게 주어지는 의는 인격적 성품이 아니라 법적 신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피고의 의는 법정이 피고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것에 있다는 것이다. 피고는 자신이 고소당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법정이 피고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면, 그는 “의롭다.” 곧 그러한 법적 신분을 갖고 있다. 

“의”에 대한 라이트의 이런 정의는 재판장이 잘못된 판결을 할 수 있고, 또 옳든 그르든 간에 재판장의 판결이 굳게 서야 하는 인간 법정에서는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전지하고 공의로우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고소의 진실과 판결의 진실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경우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과연 무엇이 “내가 너에게 의롭다는 법적 신분을 준다. 그리고 나는 네가 고소당한 대로 유죄임을 발견한다”라고 말하는 토대가 될 것인가? 정의로운 것은 고사하고 이런 판결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라이트가 동의할 것으로 생각되는 한 가지 올바른 답변은 대속이 바로 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이 판결의 토대를 제공하셨고, 그러므로 죄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법정은 관대한 사면(하나님의 경우에는 죄 사함)을 내릴 수 있고, 그 결과 우리는 석방된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관대한 판결과 하나님이 베푸시는 개인적 용서는 확실히 참되고 영예롭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것을 찬송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은 바울이 무언가 덧붙일 것—우리의 칭의의 대한 훨씬 더 넓은 기초—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곧 바울이 우리의 구원을 훨씬 더 경이로운 것으로 만들고, 우리 구주에게 더 큰 영광을 돌리는 것을 덧붙이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법정에서 죄책이 있다고 알려진 피고에게 관대한 사면(또는 용서)을 기초로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정죄하지 않고 석방시키는 것)이 그를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드러난다. 

만약 전지하고 정의로운 재판장이 죄인에게서 고소된 대로 죄책을 찾아낸다면, 법정은 관대한 사면(또는 용서)이 의롭다는 법적 신분에 대한 선언을 낳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와 관대한 사면은 선고를 바꿀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재판장이 피고의 승소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전지하고 정의로운 재판장은 항상 참된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마련이다. 만일 피고가 유죄라면, 전지하고 정의로운 재판장은 고소인의 승소를 발견한다. 이 재판장은 자비를 보여줄 수 있다. 이 재판장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사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 “칭의”나 “승소임을 발견하는 것”이나 “의인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으로 불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라이트가 제공하는 법정 심상의 세 번째 문제점은, 그가 사실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난센스”로 부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피고가 어떤 면에서 재판장의 의를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난센스가 아니다. 피고가 “재판장의 의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범주 오류가 아니다. 이것이 재판장은 전지하고 정의롭고, “의인은 하나도 없는”(롬 3:10) 것이 기소 내용인 법정에서 칭의 언어가 실제로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통상적인 인간 법정에는 맞지 않을 것이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는 항상 그렇게 행해졌고, 그렇게 행해지도록 되어 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존 파이퍼
존 파이퍼
존 파이퍼(John Piper) 박사(@JohnPiper)는 Desiring God의 설립자이자 강사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Bethlehem College and Seminary의 총장이다. 그는 A Godward Heart와 Lessons from Hospital Bed를 포함하여 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