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내세의 삶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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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내세의 삶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N.T. 라이트는 뭐라고 말했나?의 열여덟 번째 글입니다.

“사울과 같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죽음 이후의 자신의 영혼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고 믿은 구원에 절실하게 관심을 가졌다.”

–N. T. 라이트,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원제: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18쪽.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아마 그가 그 주제를 얼마나 자주 다루는가, 또는 그가 무엇을 중요한 때에 언급하는지 보면 판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이 어떤 사실에 관해 글을 쓰는 태도를 보면, 곧 글을 쓸 때 그 사실에 초연한가, 아니면 열정적인가—라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절실한가”—를 보면 판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자기에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이 더 파악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말과 글로 계속 언급하지 않는 것 중에도 실은 그에게 중요한 것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다가 어떤 도전을 받거나 질문을 받을 때 비로소 언급할 수 있다. 매우 개인적이거나 내성적인 성격인 사람도 있다. 따라서 라이트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 관해 그리고 바울에게 무엇이 중요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테스트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곧 바울은 사후의 자신의 자아의 운명에 관해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관해 여러 번에 걸쳐 글을 쓴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마지막 날에 자기에게 상으로 주실 의의 면류관이 있다고 언급한다(딤후 4:8).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 자신의 부활의 열쇠라는 사실을 상세히 제시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리스도인들 역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17). 이 본문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면, 바울은 “죽음 이후의 영혼”에 관해 생각할 때 분명히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그래서 육신으로 있기를 바라지 않는(빌 1:23) 바울의 열망은 어떤가? 그리고 바울이 자기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오는 의를 갖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로 결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빌립보서 3장의 놀라운 본문은 어떤가? 이것은 극히 개인적인 고백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이 죽음 이후에 영혼의 상태로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예컨대 고후 5:6에서)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염려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로마서 9:2를 보라. 거기서 바울은 이에 대한 또 하나의 실례로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를”(3절) 바랄 정도로, 동족 유대인에 대하여 자신이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갖고 있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표현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보인다. 찰스 하지는 저주를 받아 (accursed)라는 말은 “하나님의 저주에 당연히 노출되거나 바쳐질 자로 간주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유대인이 처한 곤경은 이처럼 바울이 스스로 저주를 받기를 바랄 정도로 컸다. 

  라이트의 말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라이트는 바울 안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에 대한 관심과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관심 사이에 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증거는 매우 혼재되어 있거나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을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취할 수도 있고, 또는 바울이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부른 자들, 곧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롬 2:29),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구원을 크게 염려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바울은 동족 곧 유대인을 위하여 저주를 받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 그들 대신 자기를 저주해 달라고 실제로 구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이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관한 바울의 관심과 “동족”의 구원에 관한 바울의 관심 사이에는 확실히 긴장이 있었다. 

또한 이 글 첫 부분의 인용문에서 라이트가 제시하는 주장에는 잘못된 대조 관계가 들어있을 수 있다. 왜 우리가 굳이 다른 한 쪽을 제외시키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까? 이 경우에 바울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지만 바울이 그렇게 했는가? 

그렇다면 왜 둘을 동시에 함께 취하지 못하겠는가? 아무리 그렇게 이해된다고 해도, 왜 이스라엘의 구원이, 민족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거나 “참 유대인” 부류에 속해 있는 자들이거나 간에, 구원받은 개인들로 구성되는 집단적 구원이 될 수는 없겠는가? 사실은 이것이 신약성경의 인도를 받아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 사실을 이해하는 방법이 아닌가? 

나아가 왜 죽음 이후에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는 한 방법, 아니 사실은 주된 방법일 수 없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과 “죽음 이후의 영혼의 상태”는 경우에 따라 동일한 사실을 말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일 것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폴 햄
폴 햄
폴 햄(Paul Helm) 박사는 런던 킹스 칼리지의 역사 및 종교 철학 명예 교수이다. 그는 The Providence of God 과 John Calvin’s Ideas 를 포함한 여러 책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