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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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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4일기독교인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가?
기독교인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가?
2015년 10월 PGA 투어 토너먼트 경기에서, 벤 크레인 (Ben Crane)은 두 번째 라운드를 마친 후 스스로 실격을 인정했다. 재정적으로 상당히 손해를 보면서 그는 그렇게 했다. 괜찮다. 크레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 손실이 더 크다고 믿었다(그날 아침 그는 유명한 전 라이드 컵 주장(the distinguished former Ryder Cup captain)인 데이비스 러브 3세(Dave Love III)가 쓴 경건한 글에 의해 고무되어 있었다).
크레인은 자신이 보이지 않은 골프 규칙 중 하나를 어겼음을 깨달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했다면, 그는 자기 공을 급히 찾고 있는 동안, 자신의 골프채를 돌 위에 기대어 놓았다. 그는 찾고 있던 공을 포기했고 그 공을 포기하는 데 따른 벌점을 받았으며, 경기를 계속해서 자신의 라운드를 마쳤다. 그는 금요일 밤에 편안하게 예선에 진출했을 것이다. 또한 재정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주말 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내가 장애 지역(해저드, hazard)에서 골프채를 지면에 놓은 것에 대한 벌점을 포함 했어야 했는가?” 당연히 그렇다 (규칙 13조 4항). 따라서 그는 실격했다.
(이해했는가? 어떤 독자도 크레인이 우승 트로피를 불법적으로 획득했다는 것으로 알고 밤 잠을 못 자지는 않을 것이다.)
크레인은 이런 행동으로 인해 널리 칭찬을 받았다. 편협하다는 이유로 사이버 상에서 악의적이거나 모욕적인 공격이나 혐오 메일을 받지 않았다. 그에게 모두 경의를 표했다. 흥미롭게도 누구도 “벤 크레인은 지나친 율법주의자(legalist)라고 하거나 글을 쓴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번 달에 우리는 새로운 스포츠 칼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크레인이 골프 규칙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인 것에 대해서는 그처럼 많은 찬사를 보지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삶의 규율인 (더 간단한)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서는 정반대의 반응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딘가 문제가 있다.
문제
예수님이나 바울도 율법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다. 바울은 자신의 은혜의 복음이 율법 – 심지어 부정적인 형태의 하나님의 규율조차도- 지지하고 확립한다고 썼다(롬 3:31).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딛 2:11-12). 또한 마 5:17-1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인 존 뉴턴(John Newton)이 “율법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무지가 대부분의 신앙적 실수의 밑바탕에 있다”고 쓸 수 있었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여기에 깊은 문제가 있다. 성경에서 은혜를 이해하는 사람은 율법을 사랑한다. (그런데 반(反)율법주의에 대한 단순한 논박은 절대 율법의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벤 크레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어째서 골프의 복잡한 규칙을 지키는가? 왜냐하면 골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지만 더 위대한 무언가가 신자에게도 적용된다. 주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율법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런 아름다운 성경적 단순성에 기초하고 있다.
아담, 모세, 예수님이라는 세 사람과 그들이 대표하는 세 개의 “활동 무대” 또는 “시대”라는 측면에서 이것을 생각해 보자.
아담
창조 때에, 하나님은 계명을 주셨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했다. 또한 하나님은 선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관대하신 분이므로 그분의 계명은 항상 우리의 유익을 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창 1:26-28 – 대단히 중요한 진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자마자 그분은 그들에게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다(29절). 여기서 문맥은 그런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즉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아담과 하와는 그분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반영하도록 그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왕이시고, 그들은 이 세상의 영주들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의 교제에서 그들이 서로를 즐거워하며 또한 창조 세계를 누리는 것이다(1:26-2:3).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출발점으로 에덴동산을 주셨다(2:7). 하나님은 그들이 에덴 동산을 땅끝까지 확장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작은 창조자 즉 위대하신 원 창조자를 본받는 형상으로써 에덴 동산을 즐기기를 원하신다(1:28-29).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명령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과 영광을 반영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들은 그분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어떤 형태로나, 모든 하나님의 명령은 그 이면에 이런 원리가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즉 “너희는 나의 형상과 모양이다. 나처럼 되어라!” 이것이 그분의 명령에 반영되어 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들은 생래적으로 새겨져 있을지라도 그분을 반영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에게 주어진 외적인 법이 있지만, 그런 법은 단순히 신적 형상에 내재된 법, 즉 이미 양심에 있는 법의 특정한 적용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본받아 그분처럼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치 어린 셋(Seth)이 본능적으로 자기 아버지인 아담처럼 행동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았기”(창 5:3) 때문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하지만 그때 타락이 일어났다. 죄, 하나님의 계시된 법에 대한 순종 결핍, 형상의 왜곡이 내적으로 타고난 인간 재능의 기능장애로 이어졌다. 하나님을 반영하는 형상은 하나님의 시선과 생명에서 돌아섰다. 그때 이후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런 조건을 공유했다. 주님은 항상 동일하다. 자신의 형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동일하다. 하지만 형상은 손상되었다. 흙을 정원으로 바꾸기 위해 창조되었던 영주는 흙 자체가 되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최선의 삶을 살 수 있게 지도하는 율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초췌하고 지쳐있고 내적으로 일그러졌고 왜곡되어 있으며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우리는 전에 최고 관리 책임자였다. 하지만 이제 단지 우리는 아주 관대하게 우리를 부양했던 회사 주인(여호와와 그분의 아들)의 것을 훔침으로써 생존하는 부랑자들이다. 율법은 내면에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지만, 기껏해야 신뢰할 수 없게 작동한다. 이는 율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롬 7:7-25절도 보라)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초상 즉 자신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길 원하신다.
모세
본질적으로 모세 율법 – 십계명으로 요약된 – 은 창조 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돌 판에 다시 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율법은 타락한 인간에게 왔고 인류의 새로운 상태를 다루기 위해 속죄 제물을 포함했다. 율법은 한 특정한 지역에 있던 한 특별한 민족에게 왔다. 또한 율법은 창 3:15 절에 약속된 구속자가 올 때까지 해당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율법의 모형과 희생 제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그날까지, 한 땅에 있던 한 특별한 민족과 관련되어 추가된 적용과 함께 주로 금지 조건으로 주어졌다.
율법은 주로 금지 형태로 어린 자녀로서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갈 3:23-4:5). 우리가 자녀들에게 전기 작동 방식을 설명하기 훨씬 전에 우리 또한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즉 “드라이버를 전기 소켓 안에 넣지 마라!” 이것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하지만 율법의 부정적 진술들이 긍정적 명령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옛 언약의 신자에게도 분명했다.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부정 형태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완전한 모습을 암시했다. 또한 2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그런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나머지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전개되는 부정적인 형태들이었다.
또한 동물 희생 제사는 인간의 죄를 대신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균형에서 부족했고 그것이 제시했던 용서를 전달할 수 없었다. 옛 언약의 신자는 이틀 연속 성전에 감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즉 제사장은 여전히 제단에 서 있었고 반복해서 희생 제사를 드렸다(히 10:1-4, 11). 마지막 충분한 희생 제물은 다가올 예정이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그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사회에 적용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민족 전역에 걸쳐 흩어졌을 때 이런 율법은 더는 그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역할을 하지 않곤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보존과 진전 또한 더는 그 율법에 의존하지 않곤 했다.
이 모든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에 잘 표현되어 있다. 즉 “도덕적 율법”은 지속되고, “의식법”은 성취되었고, “민법”은 폐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명하게 의식법과 민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19:3-5). 옛 언약 신자는 비록 덜 명료 하지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직 십계명만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의 표현으로써 법궤 안에 놓였다. 그렇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율법은 하나였다. 하지만 모세 율법은 획일적이지 않았다. 즉 모세 율법은 기초와 적용 영역을 가진 다양한 차원이 있었다. 기초는 영구적이었지만 적용 영역은 다가오는 시대가 밝아올 때까지 임시적인 제도였다.
옛 언약 신자들은 정말로 율법을 사랑했다. 그들은 율법을 즐거워했다.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그들을 많이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 원래의 명령을 다시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인들인 백성을 지도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십계명과 토라(율법) 전체를 알고 묵상했던 옛 언약 신자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율법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에서 성장하곤 했다(시편 1). 모든 규칙과 규정을 갖춘 하나님의 율법은 평생의 안전과 방향을 제공했다.
신입생이 끝날 무렵, 나는 젊은 범죄자들을 위한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삶은 심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학교에 대한 특별한 소속감, 자부심, 일반적인 성실성이 있었다. 처음에 이것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런 후에 나는 이 소년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안전 했고 그들 자신과 그들의 통제하기 힘든 성향에서 보호받았다. 교사들은 애정으로 그들을 훈련시켰다. 아마 생전 처음으로, 그들은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규율이 때때로 그들을 짜증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죄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안전했다. 그들 중 몇몇은 학교라는 환경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심지어 다시 죄를 범했다. 가령 내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더라도 나는 그 이유를 이해했다. 이곳은 그들에게 보살핌과 안전을 제공했다.
바울(Paul)은 갈 3-4장에서 비슷한 예화를 사용한다. 옛 언약의 신자들은 모세 율법의 통제된 환경에 사는 어린 상속자들이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사가 완전히 성립되었다. 새로운 차원의 자유가 존재한다. 거룩한 날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달력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고기나 옷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성전에 더 많은 희생 제사를 가져갈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 학교에서 나왔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하지만 왜 근본적인 율법이 바뀌겠는가? 왜 우리가 같은 아버지에게 덜 순종하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모세 율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으려 하신다.
예수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회복된 내적 사랑과 그분을 닮으려는 소원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진실된 인간을 재창조하기 위해 오셨다. 율법 자체는 우리 안에서 그런 모습을 성취할 수 없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용서, 구원, 권능의 부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이것을 제공하신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 3-4)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에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그들은 잘못된 결론을 도출했다) 그분은 자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설명했다. 그분은 모세가 주었던 “외형”을 완전하게 채우실 것이다(마 5:17–20). 그분은 또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복원할 것을 분명히 했다(마 5 : 21-48).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분은 대조를 하셨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기록되었으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가 아니라 오히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율법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랍비의 해석과 왜곡과 대조하셨다.
하지만 새 언약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돌 판에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다. 하지만 후에 그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을 가져야 한다는 소망을 표현했다(민 11:29). 모세의 율법은 명령할 수 있지만 능력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천상의 하나님의 산을 오르셨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쓰기 위해 성령 안에서 내려오셨다.
히브리서는 예레미야 31:31절을 인용하여 이것을 두 번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즉 히 8:10; 10:16 – 여기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율법”은 십계명이다). 율법의 주님은 주님의 율법을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다시 썼다. 율법을 지키시는 예수님의 성령으로 내면에서 능력을 받을 때 우리는 율법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옛 언약에서 생명의 원리가 “너희를 사랑하는 나는 거룩하고 보답으로 나를 사랑하고 거룩하라”였던 것처럼 신약에서 생명의 원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돼라.”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은 항상 우리를 향한 성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 29-30)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것
“율법을 사랑해야 한다”는 문장은 이중 의미가 있다. 우리는 율법을 사랑해야 한다. 즉 그것은 명령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율법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매우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율법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이다. 율법은 우리를 안전하게 해준다. 율법은 우리를 보호하고 삶을 잘 결정하는 것을 돕도록 의도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또는 더 좋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을 집어 들고 계명에 관한 단락을 읽어라. 거기서 여러분은 삶의 게임 규칙을 사용하고 적용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 규칙들은 골프 규칙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단지 아버지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계셨다. 실제로 이 말씀은 단순하지만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요한 삼미스(John H. Sammis)의 찬송가가 진술하는 것처럼 “신뢰하고 순종하라. 왜냐하면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