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인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가?
2021년 12월 14일
왜 일을 하는가?
2021년 12월 14일모든 개신교 이단 가운데 가장 큰 이단은 무엇인가?

교회 역사 시험 문제부터 시작해 보자. 로버트 벨라르민 추기경(Cardinal Robert Bellarmine)(1542~1621)은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 클레멘트 8세(Pope Clement VIII)의 개인 신학자였으며 16세기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을 이끈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한 번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개신교 이단 중 가장 큰 이단은 _ .” 벨라르민 추기경의 진술을 완성하고, 설명하고, 논의해 보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모든 개신교 이단 중에서 가장 큰 이단은 무엇인가? 아마 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인가? 아마 오직 성경(Scripture alone)인가? 아니면 종교 개혁의 다른 표어 가운데 하나인가?
논리적으로 이런 답변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런 답변 가운데 어떤 것도 벨라르민의 질문에 답이 되진 않는다. 그가 기록했던 것은 “모든 개신교 이단 가운데 가장 큰 이단은 확신(assurance)이다”였다.
잠깐만 생각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즉, 믿음이 행위로 완성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든 반복되어야 한다면,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 주권적이지 않다면,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하고, 최종 칭의가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 “추가”되어야 한다. 정확하게 이것이 문제다. 최종 칭의가 우리가 완성해야 할 것에 달려있다면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신학적으로 최종 칭의는 일시적이고 불확실하며, (로마 가톨릭이 인정했던 특별 계시와는 별개로) 누군가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이루셨고 기여하는 행위 없이 칭의가 은혜에 의한 것이고 칭의가 믿음의 빈손으로 받아들여진다면 확신 심지어 “완전한 확신”도 모든 신자에게 가능하다.
벨라민이 완전하고 거저주는 제한받지 않은 은혜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다. 종교 개혁자들이 히브리서를 좋아했던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히 10:18)을 설명하는 절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출 때 바울처럼 “그러므로”(히 10:19)로 자신의 주장을 계속하는 이유다. 그런 후에 그는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종용한다(히 10:22).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의 “그러므로”가 함유한 논리적인 힘을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서 전체를 다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마치 우리 몸이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마음은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해졌다(22절).
그리스도는 단번에 우리 죄를 위한 희생이 되셨고 우리의 대표 제사장으로서 불멸의 생명의 권능으로 부활하셨고 옳다 인정하는 얻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이 의로우신 것만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의롭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의로움 가운데 의롭게 되었고 그분의 칭의만이 우리의 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런 칭의를 잃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칭의가 완성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칭의도 완성될 필요가 없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완전한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이제 우리는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다(히 10:22).
벨라민 추기경의 로마 교회는 반박했다. “아! 이것을 가르치고 이것을 믿는 자들은 방종과 반율법주의로 살 것이다.” 하지만 대신 히브리서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라. 이런 확신을 즐기는 것은 네 가지로 이어진다. 첫째, 우리 소망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실함(23절). 둘째,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는가에 대한 주의 깊은 고려(24절). 셋째, 예배와 우리가 나누는 교제의 모든 측면에서 다른 기독교인들과의 지속적인 교제(25절). 넷째,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가 더 가까이 올수록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에게 신실할 수 있도록 서로 권하는 삶(25절).
좋은 과일을 생산하는 것은 좋은 나무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위해 구원받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그분의 작품이다(엡 2:9-10)! 따라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무관심의 삶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루셨던 사역과 그것이 가져오는 완전한 확신의 믿음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살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한다. 또한 이런 완전한 확신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하셨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을 설득해서 우리를 사랑하게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죽으셨다(요 3:16). 아들이 이루셨던 희생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길 바라면서 악한 의도로 아들 뒤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 절대 그렇지 않다! 아버지 자신이 아들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 확신을 즐기는 사람들은 성인들이나 마리아에게 가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른 곳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완전한 확신을 즐긴다. 모든 이단 가운데 가장 큰 이단? 예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전적으로 보장한다. 이단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단? 이단이라면, 내가 “이단”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이단을 즐기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진리와 은혜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