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대 세계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성경 사랑하기
2023년 08월 11일
유대인의 예배
2023년 08월 15일
성경 사랑하기
2023년 08월 11일
유대인의 예배
2023년 08월 15일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대 세계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 생활”의 두 번째 글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내가 처음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었을 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복음서에 도달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종교적, 정치적 집단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구약성경에서 그들에 대해 읽은 기억이 없었다. 헤롯 대왕은 “유대인의 왕”으로 불렸는데, 그는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로마가 다스리던 시대였던 것이 분명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로마가 유대 민족을 다스리게 되었을까? 구약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내용은 바사 왕 고레스가 유대 민족을 다스렸고 그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때 나는 신약성경의 역사, 문화, 정치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배경이 본문을 어떻게 설명해 주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대 세계를 이해하려면, 구속사에서 이 중요한 순간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역사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스라엘을 점령했고 유대 민족에게 그리스식 생활 방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성지를 “그리스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고, 그리스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리스 건축물이 세워지고, 그리스 주화가 도입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이 조상의 법에 따라 살도록 허용해 주었지만, 그리스식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일부 유대인, 특히 젊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잘 수용하였다. 챙이 넓은 그리스식 모자를 쓰고, 그리스인들처럼 체육관에서 벌거벗고 운동하기 위해 성전에서의 의무를 재빨리 끝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할례 복원 수술까지 받았다.

다른 유대인들은 이 모든 변화에 경악했고 그리스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대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고 기원전 167년 마침내 반란이 일어났다.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대 경전 사본을 없애고 할례를 금지하였다. 또한 안식일과 절기 준수를 금지하고 번제단에서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이 신성모독적인 행위에 대한 대항으로 용감한 유대의 한 가족 마카비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진정한 왕이 태어날 때까지

그분의 교회를 섭리적으로 인도하셨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인 유대교를 근절하려고 압제하는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고, 맏아들이었던 유다 마카비는 게릴라전을 일으켜 이교도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강제로 어린이들에게 할례를 행했으며 헬레니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유대인들을 죽였다. 결국 유다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안티오쿠스 4세가 더럽힌 성전을 정화하였는데 그날은 기원전 165년 12월 14일이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유대인 달력에 수전절(하누카, “봉헌”이라는 뜻, 요 10:22 참조)이라는 새로운 명절이 추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마카비 왕조(또는 그들의 조상인 하스몬의 이름을 따라 하스몬 왕조라고도 부름)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룬 사람은 시몬 마카비로 기원전 142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35년에서 104년 사이에 시몬의 아들이며 유대 민족의 대제사장이자 통치자인 요한 히르카누스의 확장 정책으로 유대인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되찾게 되었다.

많은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들은 “왕” 또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가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스몬 왕조는 배신과 암살, 정치-종교적 부패로 점철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친헬라파”와 “반헬라파”로 분열된 국가가 되었고, 사두개파는 전자를, 바리새파는 후자를 지원했다.

이런 내전이 한창이던 BC 63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 대왕이 이스라엘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바벨론, 메데-바사, 그리스, 프톨레미, 셀레우코스 통치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복종하여야 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유대와 이두매를 다스리기 위해 하스몬가 통치자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고, 유대인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러나 히르카누스 2세는 로마의 예속 왕(쉽게 말해 꼭두각시 왕)일 뿐이었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암살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았다. 그의 통치 아래서 유대 민족은 호의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세금 감면과 병역 면제를 승인받았다. 그는 또한 두 명의 하스몬가 통치자를 예속 왕으로 임명했는데, 하나는 유대 총독이라 칭호한 안티파테르, 다른 하나는 “민족의 통치자” 히르카누스 2세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되었고, 유대인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장악했는데 그들은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언했다. 그리스 문화를 숭배했던 헤롯은 이제 공식적으로 로마인들의 친구이자 협력자가 된 것이다. (마카비 조상들이 무덤에서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는 꼭두각시 왕으로서 로마의 뜻을 수행했고, 그의 후손인 헤롯 아켈라오스(마 2:22), 헤롯 빌립(눅 3장), 헤롯 안티파스(막 6장; 눅 23:7 참조), 헤롯 아그립바 1세(행 12장),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6장)도 마찬가지였다.

1세기에 통치했던 로마 황제들은 이스라엘 영토에 총독을 임명했다. 많은 총독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로마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일 것이다. 성경 외의 자료에서 그의 통치가 압제적이었다고 묘사되는데, 이것은 누가복음 13장 1절과 일치한다.

가장 큰 압제 행위는 로마-유대 전쟁(AD 66-70)이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도시를 포위한 것이다. 그러나 기근, 역병, 질병, 굶주림, 성안의 폭력은 주후 70년에 일어났던 가장 극악무도한 사건인 성전 파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의 정체성, 세계관, 종교적 관습이 크게 바뀌었고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로마 시대의 유대인 생활

1세기에는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단일화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황제는 유대 민족에게 조세 감면, 군사적 면제,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황제보다 더 호의를 보였다. 유대교는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일신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릴리지오 리사이타 즉, 공인된 종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많은 로마 황제들은 유대교의 편협함을 경멸했으며, 특히 로마 신들을 숭배하지 않을 때 그러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의심과 증오,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사도행전 5장 36~37절과  21장 38절의 기록, 또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해 기록된 1세기 전반에 걸친 여러 폭동과 반란에 의해 입증되었다시피, 유대인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열망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들은 유대인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고,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제한해 버렸다.

권력을 가진 유대인들은 로마의 덕을 보았다. 그들은 종종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가이사를 섬기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가이사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로마에 예속된 왕과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전략을 받아들인 조상들처럼 완전히 그리스화 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만 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단 2:21)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갈 4:4) 진정한 왕이 태어날 때(미 5:2)까지 그분의 교회를 섭리적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데이빗 E. 브로인즈
데이빗 E. 브로인즈
데이빗 E. 브로인즈(David E. Briones)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약학 부교수이자 Orthodox 장로교회의 교역 장로이다. 그는 『Paul’s Financial Policy: A Socio-Theological Approach』를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