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
싱크홀 신드롬   
2025년 08월 10일
예루살렘 회의   
2025년 08월 10일
싱크홀 신드롬   
2025년 08월 10일
예루살렘 회의   
2025년 08월 10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사도들의 행적”의 일곱 번째 글입니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면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아마 문화적 쇠퇴의 새로운 증거에 충격을 표현하고 “여러분은 그들이 한 짓을 믿을 수 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누군가 “물론 사회 속에서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지. 우리는 모두 부패한 죄인 덩어리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통상적인 답변이 아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놀라운 것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런 일들이 얼마나 잘 억제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사회가 불완전하기는 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제공하는 법적 제도, 경제적 제도, 건강관리 제도 등을 갖추고 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창 6:5) 인간의 도덕적 상태를 감안하면,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신학적 개념들에 의지하여 인간 문화 속에 이처럼 건전한 국면들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인간의 악한 의도로부터 선한 결과를 이끌어내신다. 하나님은 일반 은총을 통해 인간 생활 속에서 악이 심하게 준동하는 것을 억제하고 비구원적인 다양한 복을 베풀어주신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자연법은 수많은 비기독교인의 도덕적 본능과 안목들을 설명해 준다고 지적했다. 자연법은 단순히 말해 자연 계시의 한 국면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창조 질서 구조 속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도덕법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자연법은 복음을 계시하지 못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거듭나게 할 능력은 없다. 자연법은 이렇게 구원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경 계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양심 속에 하나님의 도덕적 진리를 각인시킨다. 

신약성경은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와 거류민”(벧전 1:1, 17, 2:11)으로 지칭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천국 시민이다(빌 3:20). 그러나 잠시 본향을 떠나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살고 있다(빌 2:15). 우리가 이런 세상 속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며”(롬 12:18) 살고자 할 때 자연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히 틀림없다.

성경은 “자연법”이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곳곳에서 자연법 개념을 언급한다. 창세기의 족장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자연법과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나 있다. 신약성경이 우리를 “나그네”라고 부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오랜 세월 전에 원래 나그네였던 족장들의 경험을 암시한다(창 12:10, 15:13, 20:1, 21:34, 23:4). 족장들은 참 하나님을 믿은 신자로, 이 세상에 참된 고향을 두지 않고 이방인 속에서 살았다. 성경은 우리가 족장들이 당시 세상 속에서 살았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에 관해 뭔가 배우기를 바란다. 자연법은 족장들의 삶을 어떻게 형성시켰을까?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방인 왕 아비멜렉의 흥미진진한 만남이 적절한 본보기다.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 들어갔을 때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서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였고, 아비멜렉은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재빨리 사라를 데려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통해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만나 항의한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9절). 이 이방인 왕은 분명히 결혼을 무시하는 아브라함의 분별력 없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질타한다.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9절). 아브라함은 이에 이렇게 대답한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11절). 알다시피 아브라함이 잘못 알고 있었다. 이 이방인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고(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법은 근본적인 도덕적 진리를 그들의 양심 속에 각인시켰다. 

우리는 이 이야기로부터 오늘날 나그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확실히 몇 가지 배울 것이 있다. 첫째, 자연법은 비신자들에게 사람들이 단순히 넘어서는 안 되는 도덕적 경계 의식을 부여한다. 심지어는 아비멜렉과 같은 이방인도 때때로 이런 경계를 넘어갈 때 깜짝 놀랐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비신자들과의 의미 있는 도덕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용기를 얻고, 이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둘째,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 도덕적 경계를 위반한다. 그리고 이런 위반 때문에 신자들은 큰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야곱의 딸 디나는 이방인 왕자가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함으로써” 강간을 당했다(창 34:7). 소돔과 고모라는 사회 범절을 크게 위반했고, 롯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도망쳐야 했다(창 19장). 자연법은 사람들을 결코 유토피아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장차 올 도성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히 13:14). 

셋째, 슬프게도 신자들 자신이 때때로 고정불변의 도덕적 경계를 범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계책을 세 번이나 시도했고, 그 결과 그럴 때마다 당연히 이방인에게 질타를 받았다(창 12:18, 20:9, 26:9~10). 그리스도인들은 퇴폐적인 문화에 반응할 때 자기 의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을 쉽게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종종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고, 불신자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된 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붙잡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반드루넨
데이비드 반드루넨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 박사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및 기독교 윤리학 로버트 B. 스트림플(Robert B. Strimple) 교수이자 미국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목사이다. 그는 『Politics after Christendom and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를 포함한 여러 책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