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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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의 도구적 원인
2023년 03월 09일낙태 찬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낙태 찬성 입장의 핵심은 무엇인가?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낙태에 관한 다른 사람의 권리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 여성이 낙태를 꺼리는 근거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녀는 단순히 가능한 한 많은 아기를 갖기를 원하였뿐, 원치 않는 임신을 마주하는 것에 관해서는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태아가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태아의 지위에 대해서 확실히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아마도 태아가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믿지만, 이러한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권은 절대적 권리인가?’라는 낙태 찬성 입장의 핵심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선택할 도덕적 권리가 있는가?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곧 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정된 모든 법률은 누군가의 선택을 제한하거나 통제한다. 그것이 바로 법의 본질이다. 입법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제한하지 않으려면 입법을 중단하고 투표를 중단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어떤 인간도 그 자신에게 절대적인 법은 아니다. 법과 사회를 존재 불가능하게 만드는 순수 상대주의의 윤리적 체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개인이 자율적이라는 명제에서 신속히 벗어나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낙태 찬성 운동가들이 그들의 개인 재산권을 보호하는 법에 반대하는지 궁금하다. 누군가의 텔레비전을 훔치기 위해 집에 침입한 도둑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남자는 여자를 강간할 권리가 있는가? 이런 극단적인 예는 선택의 자유가 절대적인 권리로 간주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선택의 자유는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가? 나는 선택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도할 수 없는 생명과 자유의 권리를 짓밟는다면 거기가 끝이라고 믿는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자신의 파괴를 선택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없다. 사실 어떤 사람들이 말했듯이 미국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여성의 자궁 내부일지도 모른다. 수백만 명의 태아에게 자궁은 사형수의 감방이 되었다. 작은 수감자는 재판이나 변호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즉결 처형된다. 이 처형은 말 그대로 사지가 찢어지는 것이다. 이런 묘사가 지나치게 생생한가? 너무 감정적으로 도발적인가? 아니다. 거짓으로 꾸민다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권리가 아무리 신성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생명을 파괴할 자의적 권리를 수반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기를 유산시키는 것만큼이나 정의를 ‘유산’시키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를 그렇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패트릭 헨리로 하여금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느 정도 자기 결정권을 원하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외적인 압력 아래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는 사고하는 피조물이고 선택의 자유는 소중하다. 수감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보안이 철저한 교도소에서도 개인의 선택권이 완전히 박탈되진 않는다.
태어나지 않고 낙태된 모든 아이는 잔인하게도 자신의 상태와 미래에 대한 발언권을 갖는 자기 결정의 원칙이 거부된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낙태할지 아니면 분만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어떤 발언권도 없었다. 내 생명 전체가 그녀의 손에 있었다. 그녀가 낙태를 선택했다면, 내 생명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끝났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진정한 인간이다. 우리는 한때 우리 자신의 소중한 선택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속수무책이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다른 사람의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할 권리의 두 번째 중요한 차원은 아기의 생명에 관해 언제 도덕적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성도덕과 관련되기 때문에 토론에서 매우 인기 없는 주제이다.) 아기를 가질 것인지 갖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시기는 아기가 잉태되고 발달이 시작된 후가 아니다. 강간의 경우를 제외하고 성관계에 있어 피임 수단을 쓸지, 쓰지 않을지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이다. 성적이든 비 성적이든 우리의 선택에는 항상 결과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결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윤리와 법의 공리이다.
성관계를 가질 때 또 다른 인간 생명을 생산할 의도가 없거나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관계라는 번식 과정을 통해 자손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손을 죽이는 것은 이런 결정을 처리함에 있어 책임있거나 도덕적인 방법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