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문화는 어떻게 변화에 기름을 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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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문화는 어떻게 변화에 기름을 붓는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멋진 신세계”의 세 번째 글입니다.

문화에 대한 논의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현대 복음주의의 상징적인 표어(쉽볼렛)가 되었다. 이것이 그 자체로 성경의 명령이든 단순히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문화적 반응이든 간에, 논란이 많은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유행을 추종하는 그리스도인 문화 추종자에 대하여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실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가 우리가 대중문화로 부를 수 있는 것, 특히 젊은이가 주로 주도하는 영화, 인터넷, 음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늘날 “문화”는 통속 문화를 의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시장 기능 개념으로 축소되어 있다. 음악, 영화 등은 위에서 제시한 두 번째 정의, 곧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 시대의 기호에 있어 잘 팔릴 것과 잘 팔리지 않을 것을 나타내며, 실은 단지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하기만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현대인의 기호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만약 우리가 문화 문제와 그 급속한 변화에 대하여 돌아볼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는 현대의 상투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인, “현대 문화는 항상 변하고 있다”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관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사실 문화는 급격히든 아니든 간에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급속한 변화 자체가 현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문화의 현상들(패션, 음악, 연예)은 늘 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 문화의 저변에 깔린 문화적 기초인 소비주의의 기능이다. 소비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 있어 변화는 본질적 요소다. 의도적인 진부화(陳腐化), 끊임없이 상품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장,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탐욕스러운 욕망과 같은 것들은 문화를 급속한 변화로 이끄는 요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한 대의 텔레비전, 한 대의 식기 세척기, 한 대의 차를 사면 족하고, 또 한 벌의 멋진 정장을 입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식기 세척기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5년에서 10년 사이에 바뀐다. 자주 바꾸는 것이 좀 힘들어도, 솔직히 말하면 이전 모델보다 더 좋은 모델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세상의 취향에 더 맞는 것으로 바꾼다. 심지어는 대중문화의 초국가적 국면들(청년 문화와 스포츠)도 똑같이 급속한 변화에 예속되어 있다. 어떤 아이가 작년에 입었던 옷을 또 입고 싶어 하겠는가? 그리고 요즘에는 많은 스포츠 팀이 유니폼 디자인을 매우 자주 바꾸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관중들이, 자신이 최신 디자인의 유니폼을 구입해서 경기가 마칠 때까지 입고 있으면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행운을 가져다주어 경기에서 이기게 될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는 내가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착시 현상이다. 세상은 영원히 변하고 있는 상태로 보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그림들이 번적거리면서 한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착시 현상이고, 모든 세대가 자신에 관해 믿고 싶어 하는 신화(神話)를 낳는 현상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은 독특하며 특별하고, 작년에 지배했던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절대로 말이다. 우리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해마다 변한다고 해도 거의 변하지 않는 일관된 문화가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종교를 만들어내는 소비주의 문화다. 이 소비주의 문화는 교회가 반드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변에 깔린 기반이다.

그러면 교회는 소비주의 문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문화 반대 집단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 차원에서든 교파 차원에서든 반-문화의 대행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 법률 제정, TV 프로그램 등과 같은 문화 현상에 대해 교회가 선포한 “문화 전쟁”은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문화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이 점에 있어 교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확실히 이 소비주의 정신의 가장 불행한 결과 속에, 정통주의를 반대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견고하거나 안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다른 어떤 것으로 움직이거나 해체되거나 무너지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변할 때, 참된 고정성 관념은 아무런 의미나 중요성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의미의 참된 개념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덧붙일 수 있다. 세상이 물질적 소비를 따라 가는 방식과 세상이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 간의 연관성은 복합적이지만 매우 명확히 존재한다. 끊임없는 변화의 미학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당연한 한 요소로 간주될 때, 이 미학은 불가피하게 우리가 어떤 바지를 사야 할지를 선택하는 방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끊임없는 변화의 미학이 세계 전체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둘째, 소비주의에 끌려가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은 생산품 또는 상품이다. 그리고 시장이 참아 줄 것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 되며 여러분의 상품을 시장이 필요로 하는 상품으로 형성하고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정통주의가 상품으로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통주의를 변화시키고 재포장하고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항상 진열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상품과 경쟁할 수 있게 하기 전에는, 팔린다고 해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요약하면, 기독교에서는 ‘진리는 변하지 않고, 바울 당시의 예수님은 오늘날의 예수님이며, 하나님은 그분 앞에서 우리 모두가 객체가 되는 크신 주체이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갖고 있는 기독교는 그 존재 자체에 의해 현상적 레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 기초적 레벨에서도 문화에 저항한다. 현상적 레벨이라 함은, 문화에 있어 안정성이 아니라 가변성이 진리가 되기 때문이며, 기초적 레벨이라 함은 이 문화가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의 협상을 항구적인 동력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혁명을 팝니다』(마티 출판사 역간, 원제: Nation of Rebels: Why Counterculture Became Consumer Culture)라는 매력적인 책에서, 조셉 히스와 앤드류 포터는 1960년대에 디자이너의 로고가 된 “노 로고(No Logo)”와 같은 표어를 통해 소비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어떻게 반-문화 운동이 종식되었는지와 그것이 그 자체로서 어떻게 시장을 엄청나게 점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예증한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소비주의는 지금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문화의 힘 가운데 하나이고, 어떤 것을, 심지어는 상품과 정반대에 있는 것까지도, 상품으로 바꾸어버리는 소비주의의 능력은 가공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의 히피족마저 휩쓸어 버린 소비주의는 확실히 우드스톡에 모인 군중보다 항상 미국의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에 항상 더 가까웠던 미국 복음주의에 있어서는 훨씬 더 큰 위험 요소일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단순히 변화에 변화로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문화를 이끄는 동력들 곧 상업 마케팅, 탐욕, 능력과 성공에 대한 세속적 개념, 복음보다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는 욕구 등과 교회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현대 정치에서 사용되는 말을 빌려온다면, 우리는 로컬하게 행동하고 글로벌하게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지역 교회는 확실히 문화를 반대하는 저항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예컨대 사도신경을 주일마다 낭송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동안 기독교는 다시 만들어지는 종교가 아님을 교회와 세상에 명확히 선포하는 것이다. 2년 이상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목사들은 목회 직분이 자신의 경력을 관리하여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보노 서정시, 또는 이런 저런 정치가의 정치적 강령에 대하여 공허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보다 복음 전파에 우선권을 두는 것도 그렇다. 그렇게 공허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은 장려할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가장 피상적인 증상에 불과하다. 

급격히 변화하는 우리의 주변 문화는 무한히 증가하는, 진리를 창조하고 재창조하고 재포장하고 또 다시 바꾸어, 만족을 모르는 물주들에게 계속 판매하는 소비 시장의 능력의 표징이다. 그러나 교회로서 우리는 이 변화의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해서 변화의 사실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변화는 빙산의 일각과 같으므로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고, 그 위협은 사실 수면 아래에 있다. 교회는 모든 것을 협상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 변화의 문화에 무조건 저항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 변화의 문화 배후에 있는 동력에 저항해야 한다. 저항해야 할 그 동력은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정말 걱정스럽게 우리의 전체적인 경제적 관점을 이끌고,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형성시킨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칼 트루먼
칼 트루먼
칼 트루먼 (Carl R. Trueman) 박사는 펜실베이니아주 그로브 시티에 있는 그로브 시티 칼리지의 성서 및 종교학 교수다. 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정통장로교회(OPC)의 강도 장로이며 윤리 및 공공 정책 센터의 펠로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