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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인들이 흔히 겪는 고민들”의 세 번째 글입니다.

소망이 삶을 갈망하는 것이라면, 절망은 끝을 갈망하는 것이다. 로뎀나무 아래 있던 엘리야(왕상 19:1–10 참고),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했던 욥(욥 3장 참고), 심한 고난에 눌려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바울(고후 1:8 참고)처럼, 산 소망으로 거듭난 신자들도 고통의 때에는 갇힌 듯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시 42:7).

욥은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욥 17:1)라고 탄식했다. 이것은 그저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우리가 감당하도록 만들어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고통의 실상을 드러낸다.

절망은 우울한 사람이나 불만이 많은 사람, 또는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처럼, 우리가 흔히 그럴 법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지 않다.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존 번연처럼 활기찬 성도들조차 깊은 고통과 번민의 시기를 겪었다. 절망은 기질이나 영적 성숙도를 따지면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오직 한 가지,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란다. 이 싸움은 본질적으로 해결책도, 탈출구도 없는 패배감과 허무함이라는 강력한 환상에 맞서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 69:2).

우리는 거친 바다에서 발버둥 치는 것처럼, 구조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모두의 눈앞에서 가라앉는 듯 느낀다.

서서히 가라앉든지 마음과 영혼이 갑작스레 벼랑 끝으로 떠밀리든지, 절망은 신자가 가진 소망의 실재를 왜곡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의 역량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회복이란 우리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순종과 인내와 소망이라는 ‘작은’ 걸음을 내딛음으로써 절망의 기세를 끊며, 왜곡된 인식과 역량을 되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절망적인 생각을 반추하지 말라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절망이라는 거인’의 성에 갇혀 시들어 갈 때, 그 어둠은 단지 착각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도 숨 막히는 현실이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매우 암울한 상황의 한복판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절망은 그런 상황을 끝없이 되새기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가린다. 크리스천이 구원을 얻은 것은 어둠이 끝나서가 아니라, 그의 주머니 속에 있던 약속의 열쇠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끊어 내고 새롭게 빚어 가야 한다. 버려질 듯한 느낌이 엄습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 떨어진 것 같을 때, 그분께서 스올 깊은 곳까지 내려가셨던 것을 기억하라.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당신을 대신해 탄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몸을 돌보라

엘리야가 절망에 짓눌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음식과 쉼을 주시고, 친히 임재하셨다. 우리는 힘이 소진되면 다시 채워져야 하는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겸손은, 날마다 운동하고 충분히 자며, 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햇볕을 쬐며, 필요한 경우 의학적 도움을 받고, 해야 할 일을 억지로 밀어붙이기보다 쉼을 누리라고 요구한다.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 일이 하찮거나 헛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것은 피조물로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강력한 순종의 행위이다. 

밖으로 시선을 돌리라

생존 본능과 마찬가지로, 절망은 고통당하는 사람의 전 존재를 집어삼키며, 자신에게 몰두하고 고립되도록 몰아간다. 반면 다른 이들과 시간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며 함께할 때, 왜곡된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강한 소용돌이는 힘을 잃는다.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사랑을 받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대화와 관심을 통해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작은 돌봄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게 하며, 자신에게만 몰두하도록 끌어당기는 힘에 맞서는 강력한 대응책이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의 쪽지를 보내며, 대화의 초점을 그들에게 맞추라. 이 모든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금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길이다.

일상 속에서 누리는 구원

절망이 우리 삶에서 본질적인 것들만 남길 때, 그 본질적인 것을 우리를 건져 내는 일에 사용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받아들이자. 아무리 작아 보여도 일상의 규칙은 질서를 세운다. 아침마다 일어나고 빨래를 하고 잔디를 깎는 것처럼 단순한 일들은, 평범한 삶을 유지하고 목적을 붙들게 하는 생명줄이 된다. 그런 노력이 기계적으로 느껴지더라도, 눈앞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망의 행위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눅 16:10 참고)은 우리의 역량을 다시 세우고, 의미와 목적을 확증하며, 평범한 일들을 우리를 절망에서 건지는 도구로 바꾼다.

창조 가운데 나타난 위로

두려움이 크게 드리울 때,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기억하는 것은 위안을 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삼성의 띠에서부터 바다의 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붙드시는 성품과 주권을 드러내시자, 욥의 절망은 예배로 바뀌었다. 자연 속을 거닐고 별빛 아래 누우며 꽃을 심고 동물을 돌보는 가운데 창조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를 통해 우리를 돌보실 때 우리의 관점이 바로 세워진다. 

인내로 견디라

어둠이 지속되고 위안을 얻지 못할 때, 고난에서 소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는 시간과 신뢰가 필요하다.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연약함과 필요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 그분의 승리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도 참여하여 교제하게 하신다(빌 3:10 참고). 비틀거리는 믿음의 걸음을 인내로 이어 가라.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절망의 때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선한 일이다.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그림자가 더 짙어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받아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을 결코 집어삼키지 못한다(골 1:13 참고).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카라 데더트
카라 데더트
카라 데더트(Kara Dedert)는 사립 가족 재단에서 일하며, ‘싱크 트와이스: 복음적 관점으로 본 일상(Think Twice: Everyday Life with Gospel Perspective)’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녀와 남편 대릴(Darryl)은 다섯 자녀와 함께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