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리히의 혁명가: 울리히 츠빙글리
2022년 05월 18일
세기의 신학자 : 존 칼빈
2022년 05월 26일언약 신학자: 하인리히 불링거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가장 영향력 있는 2세대 종교 개혁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후계자로서 전임자가 시작한 스위스 종교 개혁을 통합하고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글에 의하면 블링거(Bullinger)는 “확고한 믿음, 용기, 절제, 인내와 지구력을 가진 사람… 역사의 어려운 시기에 진리를 보존하고 진척시키기 위해 섭리 속에서 준비되었던 사람”이었다. 취리히의 대표 사역자로 있었던 44년 동안 불링거의 문학 작품은 양적인 면에 있어 마틴 루터, 존 칼빈, 츠빙글리의 작품을 능가했다. 그는 종교 개혁 전반에 걸쳐 개혁주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이다. 불링거의 영향력은 유럽과 영국 전역에까지 너무 광범위해서 베자(Theodore Beza)는 그를 “모든 기독교 교회의 공통 목자”라고 불렀다.
불링거는 1504년 7월 18일 취리히에서 서쪽으로 10마일 떨어진 스위스의 작은 마을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태어났다. 하인리히라고도 불리는 그의 아버지는 지역 교구 사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안나 비더케어(Anna Wiederkehr)와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 로마 가톨릭 위계 제도는 이런 관행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지만 불링거의 아버지는 주교에게 매년 세금을 바치는 것에 동의함으로 그 관계를 허가받았다. 어린 하인리히는 이 불법적인 결혼 생활에서 태어난 다섯 번째 아이였다. 불링거의 아버지가 종교 개혁 운동에 합류했던 1529년, 마침내 불링거의 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정식으로 승인받았다.
젊은 하인리히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게 하기 위해 훈련시켰다. 12세 때, 그는 공동생활 형제 학교(the School of 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로 알려진 에머리히(Emmerich)의 수도원 학교로 보내졌다. 이 학교는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 ~ 1274)와 요한 둔스 스코투스 (John Duns Scotus, 대략. 1265 ~ 1308)와 같은 중세 성기(中世盛期, High Middle Ages)의 신학자들이 강조했던 “옛날 방식(the old way)”이라는 학문적 방식의 본거지였다. 그곳에서 불링거는 인문주의 원칙과 특히 라틴어에 대한 고급 교육을 받았다. 동시에 성찬(the Eucharist)과 깊은 영적 삶에 대한 중세의 강조인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즉 “근대적 경건”의 영향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르나르는 이 경건주의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á Kempis)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에서 이 운동을 부활시켰다. 불링거는 묵상에 대한 이 운동의 강조점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영적 경험에 대한 탐구에 매료되었다. 또한 이때 불링거는 학문에 놀라운 소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쾰른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gne)
3년 후인 1519년 불링거는 쾰른 대학으로 진학하여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쾰른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였는데 로마 가톨릭이 그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 도시에는 교황주의 미신이 팽배해 있었고 독일 신비주의자들이 대거 모였다. 일찍이 아퀴나스와 스코투스가 그곳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스콜라적 영향력은 쾰른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었다. 하지만 불링거는 인문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 교부들, 특히 암브로스, 크리소스톰,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를 연구했다. 성경의 우월성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그가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도록 감동을 주었다. 그가 나중에 인정한데로 그런 성경 연구는 그의 동료 학생 대부분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쾰른에 있는 동안 불링거는 로테르담(Rotterdam)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대략1466 ~ 1536)의 가르침을 접하게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보다 높였고 인문주의적인 학문과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불링거의 생각에 가장 크게 도전을 준 것은 루터의 저서였다. 루터의 책들은 쾰른에서 불태워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루터의 저서에 관한 불링거의 관심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루터의 사상은 곧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또한 루터 신학의 첫 번째 체계적 연구인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의 신학총론(Loci communes)(1521)을 연구했다. 신학총론에서 멜란히톤은 의지의 노예와 칭의론이라는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교리를 다루었다. 이 저서는 불링거에게 더욱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마음속에 개혁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열일곱 살 때,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핵심적인 진리를 받아들였다. 이런 개인적인 변화를 겪는 가운데 불링거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1522년 불링거는 새사람이 되어 고향인 브렘가르텐으로 돌아왔다. 그는 교회 교부들, 루터, 멜란히톤에 대한 독서와 함께 성경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계속했다. 다음 해에 그는 카펠(Kappel)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Cistercian convent)의 원장이 되었다. 1523년부터 1529년까지 그는 신약 성경에 기초해서 수도사를 지도했고 개혁주의 교리를 소개했다. 그의 영향으로 미사 대신 개신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또한 많은 수도사들이 개혁파 목사가 되었다.
불링거는 1527년에 5개월간 휴가를 내어 취리히를 여행했다. 이것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여행이 되었다. 마침내 스위스 개혁자 츠빙글리를 그의 강연장에 참석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자신과 스위스 개혁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는 1528년 1월 7 일에 열린 베른 논쟁에 츠빙글리와 동행하도록 임명되었다. 이때 베른의 10개 논제가 발표되었고 모두의 서명을 거쳐 동의되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종교 개혁을 내부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특권이었다. 이후에 불링거는 신학을 토론하기 위해 츠빙글리와 취리히로 매년 여행을 떠났다. 이 긴밀한 관계를 통해 츠빙글리는 성경에 대한 불링거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후계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우젠(Hausen)과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목회
1528년 후반에 불링거는 카펠 근처 하우젠에서 마을 교회(the village church)의 파트 타임 목사가 되었다. 그는 6월 21일 첫 설교를 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설교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직책이 되었다. 다음 해 불링거는 개혁파 교리에 헌신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브렘가르텐에서 자신이 맡은 교구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링거의 아버지는 교구민들의 저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직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특이하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젊은 불링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했던 성경적 개혁을 계속했고 브렘가르텐의 종교 개혁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내를 얻기 원했던 불링거는 오텐바흐(Oetenbach)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녀원의 수녀들이 개혁주의 신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529년 으로 그곳으로 떠났다. 수녀원은 해산되었지만 두 명의 여성이 개신교 증인이 되기 위해 머물렀다. 그 중 한 명이 안나 아들리슈바일러(Anna Adlishwyler)였는데 그녀는 헌신적인 신자였다. 불링거는 그녀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고 그녀는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후 수년간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낳았고 다른 아이들도 입양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아들 가운데 6명은 모두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다음 2년 동안, 불링거는 강단에서의 설교 사역과 많은 집필 사역을 통해 개혁주의 가르침이 전파되는 것을 도왔다. 이때부터 그는 신약 성경에 대한 긴 주석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다.
개신교 신앙이 스위스에 정착하기 시작하자 곧이어 로마 가톨릭의 저항이 나타났다. 취리히에서의 개신교 부상에 경각심을 느낀 5개 가톨릭 주(州)는 1531년 10월에 개혁주의 거점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어떤 개신교 주도 취리히시를 도와주지 않았다. 10월 11일, 카펠 전투에서 개신교인들은 매복해 있던 적에게 기습을 당했고, 군목으로 섬겼던 츠빙글리는 살해당했다. 취리히는 불리한 평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브렘가르텐을 포함한 스위스의 일부 지역은 가톨릭으로 회귀하였다.
불링거는 개신교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브렘가르텐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그는 취리히로 피신했다. 3일 후 취리히에서 그는 츠빙글리가 설교하던 강단에서 설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불링거의 설교는 너무 강력해서 사람들은 츠빙글리가 다시 살아돌아온 것 같다고 외쳤다. 츠빙글리의 추종자인 오스왈드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는 “그는 불사조처럼 잿더미에서 살아났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당시 스위스 교회는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츠빙글리와 동일한 개혁파 신념과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불링거의 모습 속에서 바로 그 사람을 발견했다.
취리히의 수석 장관
6주 후인 1531년 12월 9일,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던 불링거는 취리히 시의회와 시민들의 만장일치로 츠빙글리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시의회가 도시 생활의 모든 면에 관해 설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기로 동의한 후 불링거는 그 직책을 받아들였다. 그는 도시의 수석 장관, 즉 “주임 목사(antistes)”가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2월 23일 그는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 강단에 섰고 1575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44년간 이 직책을 지켰다. 불링거는 일종의 “개혁파 주교”로서 주(州)의 종교 회의에서 다른 교회들을 주재했으며 학교 제도의 개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불링거는 지칠 줄 모르는 설교자였다. 취리히에서 사역한 첫 10년 동안 그는 일주일에 6~7번 설교했다. 1542년 이후로는 일주에 두 번, 주일과 금요일에 설교했다. 이로 인해 그는 혹독한 집필 일정에 전념할 수 있었다. 불링거는 성경 전체를 구절별로 옮기며 설교해 가는 방식(lectio continua)에서 츠빙글리를 따랐다. 그의 강해 설교는 성경적이었고, 단순하며, 명확했고, 실천적이었다. 불링거는 취리히에서의 설교를 포함해 모두 7,000~7,500여 편의 설교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강해 설교들은 성경을 폭넓게 다루었으며, 그가 쓴 주석의 기초가 되었다.
불링거는 또한 마음이 넓은 목사였다. 그의 집은 과부와 고아, 그리고 이방인과 망명자, 박해받는 형제들에게 늘 열려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은 물론 옷과 돈까지 거저 주었다. 불링거는 심지어 츠빙글리의 미망인을 위한 연금을 확보하고 자기 아들과 딸들과 함께 츠빙글리의 자녀들을 교육했다. 그는 병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최초의 개신교 서적 중 하나를 출판했던 헌신적인 목사였다. 영국의 박해받는 신자들 중 많은 사람이 메리 튜더(Mary Tudor)의 공포 통치에서 탈출하여 취리히에 머물렀고, 불링거의 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영국 청교도 지도자들이 되었다.
상당한 신학적 능력을 갖추었던 불링거는 제1차 스위스 신앙 고백서(the First Helvetic Confession)(1536년)의 공동 집필을 도왔다. 또한 그는 취리히 일치 신조(Consensus Tigurinus)(1549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자는 스위스 국가 최초의 신앙 고백서였고, 후자는 칼빈과 불링거가 성찬에 대한 개신교의 불일치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였다. 이 문서를 놓고 진행된 논의 중에 불링거는 칼빈을 취리히로 초대하여 대면 회담을 했다. 칼빈은 이 초대에 응했다. 1549년 5월 20일, 칼빈과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은 취리히로 떠나 불링거를 만났다. 칼빈과 불링거는 성례에 관한 합의에 도달함으로 제네바와 취리히에서의 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나로 묶어내었다. 이런 신앙 고백서들로, 불링거는 종교 개혁 초기에 스위스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성찬에서 루터파의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비판했고, 침례에 관한 재세례파의 교리에 반박했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급진주의 운동에 대해 여전히 열려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에드워즈 6세(Edward VI)(1550)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1566)를 포함한 영국 왕족이 불링거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지도자들이 로마에 맞서 싸울 때 그들을 동료 개혁 교회 신자로 보았다. 그의 책 『열 편의 설교 모음집(Decades)』의 일부가 에드워즈 6세와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ay)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헤센의 필립(Phillip of Hesse)을 포함하여 전 세계 개신교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았다. 현명하고 균형 잡힌 그의 조언은 개혁주의 운동에 있어 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향을 제시했다.
불링거는 그의 말년에 아내 안나와 딸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1564년과 1565년에 발생한 전염병이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불링거 또한 두 번째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심하게 아팠다. 전염병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건강이좋지 않았던 그는 1575년 9월 17일, 열정으로 가득차고 유능했던 40년 간의 그의 삶을 마감했다. 그는 주권적 은혜의 진리에 풍부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이런 유산은 종교 개혁에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