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의 표지와 증표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2022년 02월 17일
그리스도인과의 연합
2022년 0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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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의 표지와 증표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그리스도와의 연합” 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권능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것처럼(시 33:6~9; 히11:3) 하나님은 복음이 부르는 능력으로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다(살전 2:13-14; 벧전 2:9-10).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우리가 하나의 백성인 것처럼 이런 부르심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을 요구한다(엡 4:4-6).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도의 교제로 규정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시킨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2, 9 KJV).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체험적 기독교의 핵심이다. 교회의 충만한 기쁨은 성도 간 상호 교제와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이다(요일 1:3~4). 그리스도 몸 즉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엡 1:22~23)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모든 지체 안에 거하신다(롬 8:9).

내재하는 성령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나누는 친교의 본질이다(고후 13:14; 엡 2:18).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과 효과적으로 연합시키는 끈이시다”(기독교 강요 3.1.1).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인 것처럼 우리는 주 예수님과 “한 영”이다(고전 6:16-17). 당신의 영혼이 친구 안에 거할 수 있다면 당신이 그 친구와 얼마나 가까운지 상상해보라.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각 지체들과 맺는 친밀함이 그런 것이다. 같은 성령이 우리에게 세례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게 하시고 믿음, 생명, 예배, 섬김 안에서 우리를 연합 시킨다(고전 12:12-13; 벨직 신앙 고백서, 제 27 조).

그러므로 교회의 성례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맺은 연합과 성도와의 연합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데,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갈 3:26-2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6절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 행위나 할례, 세례 또는 주님의 만찬과 같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2:16; 5:2절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절은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한다. 그들은 세례를 원인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그리스도와 연합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된 표지로 보아야 한다. 1545년 교리문답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진술한다.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더 확고하게 각인시켜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외적 증거이고, 가시적 표시로써 영적인 것을 나타내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영적인 것을 확신합니다. (질문 310)

세례 자체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구원했다면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고전 1:17).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왜 복음을 전하는가? 세례가 아니라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성례에서 구원을 찾기 위해 외적인 표시에 집착해야 한다든가 또는 성례 안에 감추어진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이 표시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직접 인도할 수 있는 도움으로 그래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하도록 이 표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교리문답 질문 318)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4절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즉 우리는 성례를 받을 수는 있지만 여전히 믿지 않고, 회심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거절당할 수 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가 세례,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새 언약의 성례를 언급하는 방식에 주목하라. 성례는 구원하지 못하고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은 세례와 성만찬이 단지 기억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결코 아니다. 사도들은 종종 신자들에게 그들의 세례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분과의 연합의 표시로 되돌아보라고 권면한다(롬 6:3~4; 갈 3:27; 엡 5:25~26; 골 2:12; 벧전 3:21~22). 우리가 나누는 빵과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친교이다 (고전 10:16). 믿음 안에서 사용할 때 이것들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속죄 사역의 유익에 접근하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은혜를 발견하게 하는 방편이다(롬 6:1~14).

성례는 방편이다. 그리스도는 이 방편으로 성령의 사역을 통해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영적” 음식과 음료를 받는 것(고전 10:3-4),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마시는 것에 관해 말했다(12:13).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에 관해서도 말했다(엡 5:18).

칼빈은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성례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기독교 강요 4.14.9). 게다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감동시키시며 우리의 정신을 조명하시고 우리의 양심을 확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의 사역으로 간주해야 하고 찬송이 오직 그분에게만 돌려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 자신은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성례를 열등한 방편으로써 사용하십니다. 이 경우 성령님의 능력은 조금도 감소되는 일은 없습니다.(교리문답 질문. 312)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분을 기념하여 성만찬을 기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제 또는 영적 교제를 갖는다. 고전 10:16-20절에서 다양한 나오는 “친교”(헬라어 코이노이아: “공통적으로 참여하거나 나누는 교제”)라는 단어의 반복에 주목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 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빵과 잔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교제”라는 바울의 말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부분적으로 그가 의미했던 것은 우리가 그것으로 “한 몸”으로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17절). 우리는 서로 교제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즉 “내가 너희에게 묻는다. 우리 사이에 코이노니아(교제)가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것에서 오지 않는가?(고전 10:16절에 대한 주석). 

바울은 구약성경의 예배자에 관해서 말할 때 코이노니아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희생 제물을 먹으면서, 그들은 제단에서 친교를 가졌다. 그들은 피의 희생과 안수 받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과 식사를 나누었다. 교회는 주님과 언약적인 식사를 나누며, 피로 산 은혜에 기초해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즐겁게 먹었다.

바울은 또한 이교도 예배자가 쓰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귀신과 친교를 가졌다. 그들은 불결한 영들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 바울은 예배자들이 실제로 그들이 예배하는 타락한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귀신들과 함께 참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영적 간음의 한 형태이다(22절). 분명히 이런 “교제”는 매우 중요한 영적 실체이다. 바울은 이런 이교도의 예배를 주님의 만찬과 직접 대조하고 있고 분명히 우리가 그것들을 유사한 것으로 보기를 원한다(21절).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피의 교제”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으로서 높아진 그리스도 자신과 영적인 교제를 가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이 주는 혜택과 끝없는 생명의 권능을 누리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떡이 되사 우리의 심령이 그것을 먹고 참되고 복된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영적인 잔치인 것이다(요 6:51)”(기독교 강요 4.17.1).

성례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소중한 의식”으로 가치 있게 여기자. 우리가 “단순한 상징이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위선자들”처럼 성례를 사용한다면 우리의 확신은 잘못된 것이고 성례의 외형적 상징은 공허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례를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처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성령의 은혜에 대해 성례가 보여주는 약속”을 본다(갈 3:27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실 것이다(엡 3:16~17).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조엘 비키
조엘 비키
조엘 비키(Joel R. Beeke) 박사는 청교도 개혁 신학대학원의 총장이자 조직신학 및 설교학 교수이다. 또한 그는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에 소재한 헤리티지 네덜란드 개혁파 회중 교회의 목사이고 RHB(Reformation Heritage Books) 출판사의 편집 책임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칼빈주의 서론(Living for God’s Glory): An Introduction to Calvinism)』을 포함한 많은 책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