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의 의미는 무엇인가?  
2024년 12월 07일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의 의미는 무엇인가?  
2024년 12월 07일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하나님 아래 나뉘어질 수 없는 자유를 가진 하나의 나라…” (번역 주, 미합중국 충성 서약 내용) 우리는 이렇게 선서한다. 우리는 그것(특히 “하나님 아래”라는 부분)에 대해 논쟁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 실제로, 미합중국(United States)은 얼마나 통합(united)되어 있는가? 링컨이 추구한 “보다 완벽한 연합”은 조화라는 측면에서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도덕적, 철학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는 국가이다. 그러나 형식적, 조직적인 통합의 외형적인 껍데기는 아직 남아 있다. 연합은 있지만 하나됨은 없다.

‘합’중국(‘United’ States)이 그러하듯이, 기독교 교회의 연합과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를 정의하는 고전적인 네 가지 용어 중 하나이다. 니케아 회의(325 AD)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적이다.

오늘날 교회 기관들은 사도적인 것에 대해서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거룩성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두 가지 특성이 교회 사람들의 마음에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면, 보편성과 통일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교회는 조직적인 면에서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탄생 이후로 교회는 합병보다 분열을 더 많이 경험했다. 성공회가 동성애를 실천하고, 회개하지 않은 동성애자를 주교직에 임명하기로 결정한 후에 분열의 위기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연합은 헛된 희망일까? 그것은 단지 역사적인 표현에서 나타나는 환상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연합의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교회의 가장 깊고 중요한 연합은 영적 연합이다. 우리는 교회의 연합과 관련해 외형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으로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구별할 수는 있고, 반드시 구별해야만 한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에 대해 가장 깊이 있게 가르친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이 고전적인 구분을 통해 어거스틴은 두 개의 별도의 교회, 즉 눈에 확실히 보이는 교회와 시각적인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교회, 를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하 교회”와 모두가 볼 수 있는 땅 위의 다른 교회를 상상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교회 속의 교회를 묘사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서 단서를 얻었다. 그 가르침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영광 속에서 깨끗하게 하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있는 몸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가라지는 그리스도의 정원에서 꽃들과 함께 자라는 잡초다.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와 비신자,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가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런 모습의 교회를 “혼합된 몸”(corpus permixtum)이라고 설명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참된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다. 그것은 거듭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이다. 또는 어거스틴이 관찰한 대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주님의 날카로운 경고의 정점은 산상설교에서 나타났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라지들의 주장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일축하실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떠나라고 요청하실 것이다(아니, 명령하실 것이다). 주님은 어느 때도 그들이 진정한 교회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나는 너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양이었다가 염소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불신자였던 유다의 아들과 딸들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칭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라고 선언하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전도의 방법과 기술적으로 성과가 있다고 가정함에 있어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강단 초청에 응답하거나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을 내리고, “죄인의 기도”를 암송하는 모든 사람들이 개종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 통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경향이 있다.  이 도구들은 외적인 고백을 측정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보게 해주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신앙은 오직 그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심지어 열매 조차도 속일 수 있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외형적인 것 너머에 있는 것은 관통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또한 보이지 않는 교회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신자가 어떤 섭리적인 장애 때문에 교회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게 있을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가 지역 교회의 새 신자 교육에 참석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의 참된 지체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속한 보이는 교회와, 다른 거듭난 사람이 속한 보이는 교회가 다를 수 있지만, 두 신자는 실제로 이미 하나의 진정한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이미 연합되어 있다.

신자들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신비적인 연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거듭날 때 생기는 양방향 거래에 대해 말한다. 모든 회심자는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연합을 경험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는 제자들의 연합을 위해 올려드린 기도로,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간구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연합을 보장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것은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에 근거한 공통의 유대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R.C.스프로울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창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Sanford)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초대 설교 및 강도 목사였고,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는 을 포함하여 백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