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장 28절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고린도전서 13:13
2022년 09월 15일
빌립보서 4:13
2022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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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28절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그 구절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나요?”의 여덟 번째 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기록된 바울의 말은 여러 그릇된 입장을 지지하고자 할 때, 잘못 인용되곤 했다. 이 본문은 보통 둘 중 하나로 잘못 해석된다. 첫 번째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울이 진술하는 바의 중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 일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평등주의, 성전환 지향주의, 포괄적 문화 동화, 인종 무관심, 계급과 차별 없는 사회 등을 옹호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상들은 바울의 논점과는 전혀 무관하다. 바울이 외치는 동등성은 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간의 모든 차이를 없애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특정한 구분은 창조 때부터 성립되었다. 가령, 안식일과 다른 일반적인 날들(창2:2-3, 출16:22-26, 막7:19), 노동과 휴식(창2:15, 살후3:10, 약5:4),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 차이(창2:18; 고전11:3-16)들이다. 이러한 실제는 바울이 언급하는 세 가지 범주에 대한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유효성을 알려준다. 세 가지 범주란 성역할(남성과 여성), 사회 노동 계층의 구별(종과 자주자), 그리고 민족(유대인과 헬라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혜택에 차별, 우위, 또는 불리함 없이 참여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 역할을 폐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에베소서 5장 22절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구원에 대해, 후자는 가정 내의 성 역할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도 특정한 성적 역할의 구분이 있다. 자격을 갖춘 남성에게만 교회의 직분이 허락되는 경우가 그렇다(딤전 2:12-15).

종과 자주자.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간청은 당시의 사회, 노동 계층을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의 주종 관계보다 더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구세주 안에서 연합된 형제라는 사실이라고 빌레몬을 일깨운 바울이다. 바울은 이렇게 계층의 구별에 앞서 복음을 더 우위에 두었다.

유대인과 헬라인. 민족과 문화가 그 자체로 창조 규례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명령받아 왔다(행 17:26). 우리 중 그 누구도 날 때부터 자신이 속하게 될 민족과 문화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적 지혜와 함께한다. 

성경의 문맥과 비유를 고려했을 때, 바울은 모든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위해 육체적 구별을 강조하기도 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차이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사역에 방해가 되는 차이점들을 제거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전 12:13, 골 3:11). 여기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때가 차기(갈 4:4)”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담이 있었다(엡 2: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민(신 7:6)”으로 “만민 중에” 택함을 받았다(신 10:15). 그러나 이 백성은 “자기의 길”을 걷는다(행 14:1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열방을 유업으로 주신다고 하신 예언의 성취를 위해 왕국을 개시하셨다(시 2:8, 왕상 8:41-43).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기 전에는 모든 국가를 포함하지는 않았다(마 10:5, 15:24). 그럼에도, 모든 열방을 포괄하는 이 예언은 충격적이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방인과 할례받은 자 사이의 혼란이 이를 뒷받침해준다(행 10-11, 15). 동일한 혼란이 갈라디아 교회에 스며들었고,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인들은 할례가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추가적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할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지와 증표인 세례로 대체되었다(갈 3:27).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가? 무엇이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드는가? 유대인 또는 이방인과 같은 민족인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인 할례인가? 자유인과 종으로 구별되는 사회 계층인가? 모두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취하시는 혜택에 차별, 우위, 또는 불리함 없이 참여하게 된다. 성별, 신분, 인종,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연합이 베푸는 모든 혜택을 누릴 자격을 갖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다음에 따라오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먼저는 믿음이 가장 우선적이다. 믿음만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 3:29)”에 속할 때 외적인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육체적인 차이도 상대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연합과 비교하면 문화적 구별은 (그 아무리 아름다운 문화라 할지라도) 사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적 관계에 있어서 어떤 유사성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따라오는 특징들로 인해 다른 모든 외적 연합을 초월한다.

분열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교회 내의 특정 차이들은 허락된다. 그러나 불공평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교제를 방해하는 차별을 허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너트리신 벽을 다시 쌓는 것이다. 겉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을 판단하고, 육체에 따라 서로가 대립할 때(고후 5:16) 우리는 그 벽을 다시 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애론 게리엇
애론 게리엇
애론 게리옷(Aaron L. Garriott) 목사는 테이블톡 메거진의 편집장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에 있는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상주 겸임교수이자 미국장로교(PCA)의 강도장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