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들을 찾아내기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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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들을 찾아내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교회가 형성되다: 2세기의 그리스도 행전”의 두 번째 글입니다.

2세기 기독교는 교회가 음지에서 나와 이념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싸울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였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2세기 초에 네 명의 “선한 황제” 중 한 명인 황제 트라야누스(98–117)는 (그의 후임자들인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지 않고, 그들에게 익명으로 비난하는 것을  금하는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밝힐 때만 박해받았다. 이런 정책은 관용적이고 자비롭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에 대해 기꺼이 침묵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 결과는 정확히 순교를 의미해다.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로마 제국 당국만이 아니었다. 2세기 동안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의 적개심이 커졌다. 그리고 많은 이교도가 기독교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사모사타의 루시안(Lucian of Samosata)과 철학자 켈수스(Celsus)였다. 철학자 켈수스의 반기독교적 비판인 『참된 교리』(True Doctrine)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의 『켈수스에게 반대하여』(Contra Celsum)라는 변증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성장하는 교회에 가장 중대한 도전은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즉 기독교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우월하다고 여기고, 스스로 엘리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영지주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주후 177년경에 “철학자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갈리아 리옹의 주교인 포티누스(Pothinus)의 순교는, 영지주의자들에게 가장 유능하게 대답한 사람을 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포티누스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되었고 기독교 초기에 진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변증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는 초기 기독교가, 정통에서 벗어나 위험한 이탈에 직면해 있을 때 교회에 명확한 정의를 제시했다. 

한때 영지주의가 기독교 진영 안에서 발생했다고 믿어졌는데, 이는 주로 정통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면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기독교 진영 내에 존재하는 체제 전복적인 현상을 의미하는데,  최근에는 더 광범위한 영지주의 운동 속에 기독교적 측면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광범위한 영지주의 운동은 유대교와 이교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2세기 영지주의 운동과 유사한  운동이 뉴에이지(New Age)이다. 이는 고대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 안팎에 대표자들이 있다. 

오늘날 뉴에이지처럼 영지주의도 너무 다면적인 현상이어서, 교회 외부의 더 광범위한 영지주의 운동은 몇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지주의자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영지주의라는 이름(헬라어로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gnosis)라는 단어에서 가져온)이 암시하는 것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지식, 즉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모든 진리와 구원의 근원을 이해하는 열쇠로 여겼다. “기독교적”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의 그리스도와 복음서 자체가 사실 계시이지만(오히려 오늘날 지적 세계와 언론 엘리트들이 복음주의 종교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낮은 수준의 계시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엘리트주의적이었고, 단지 인류의 일부 즉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고 그노시스 또는 감추어진 지식을 받을 수 있다고 간주했다. 왜냐하면 이런 감추어진 지식은 은밀하게 전해져 많은 사람이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질 세계에 빠져있는 가장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절망적이며 “땅에 속한” 사람으로 무시되었다. 

내용과 태도의 측면에서 이런 영지주의 운동은 반복해서 인간적 경향을 대변했다.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이런 영지주의 운동은 놀랍도록 다양한 환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우리 시대에 뉴에이지 운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유사 기독교 영지주의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또한 어떻게 교회가 선도적 인물인 이레니우스를 통해 이런 투쟁에서 영지주의에 의해 전복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이런 투쟁은 지적인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가 자기방어에서 성공한 원인 중 하나는 개별 회중 지도자들이 영지주의 침투자들이나 개종자들에 대항하여 발빠른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들을 신속하게 거짓 신자로 식별하고 비난하고 추방했다. 대부분의 진정한 기독교 지도자는, 회중 가운데 지적 엘리트나 자칭 엘리트들에게 더 고차원적인 종류의 지식을 제공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회중 지도자들이 취했던 즉각적인 징계 조치는 초기 신학자들의 사역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신학자들은 영지주의의 일반적 원리와 특별한 오류를 자세하게 다루면서 그런 영지주의 위협에 잘 대응했다. 

영지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접근 방식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었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믿고 존중하는데, 단지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영적인 사람들에게 더 크고 비밀스러운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레니우스(Irenaeus)와 같은 반대자들의 주된 전술 중 하나는 정경의 복음 메시지가 전적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다른 거짓된 진리는 복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진정한 위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엘리트적인 영지를 수용함으로써가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써 오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의 기발한 개념에 반대하여 기독교 신앙을 뚜렷하게 정의하고, 명확히 하고,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레니우스는 기독교 신학의 첫 번째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을 저술했다. 이레니우스의 저작을 읽으면, 어떤 면에서는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큰 이익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가 기독교 신학을 건전한 쪽으로 자극했기 때문이다. 

포티누스가 순교한 이후 이레니우스가 주후 177년에 그의 뒤를 이어 리옹의 주교가 되었다. 그 이전에 그는 폴리캅(Polycarp)의 제자였다. 폴리캅은 “선한 황제” 마커스(Marcus)의 통치 기간인 대략 주후 167년에 노환으로 순교했다. 따라서 이레니우스(Irenaeus)는 철학자인 황제가 지배하는, 종교적으로 관대하고 다문화적인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것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 21세기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배타적인 가르침을 이유로 경멸당하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험에는 직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인으로서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시대에 영지주의에 맞서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거나 관용할 수 없는 것으로 비난받을 때 기독교 진리의 현대적 변종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정통 개신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레니우스가 거짓된 영지주의자들에 맞서 복음의 충만함을 찬양한 것은, 전통이 성경 외에 필수적인 교리 원천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유용한 예를 제공한다.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주로 세 가지 면에서 위협이 되었다. 첫째, 비밀스러운 영지주의 “진리”가 복음 기록에 추가되어 성경적 믿음의 기초를 이상하고 환상적인 가르침으로 희석시켰다. 둘째, 영지주의 교사들이 비밀스러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은 감독과 장로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셋째, 영지(gnosis)를 단지 선택된 구도자들 또는 자체 선택된 구도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회중과의 분리로 이어졌다. 또한 이것은 영지주의로 개종한 자들에게 자신들을 “단순한 믿음”만을 가진 일반 무리보다 훨씬 뛰어난, 참으로 “영적인” 엘리트 계층으로 스스로 높이는 이유를 제공했다. 

2세기 영지주의는, 뉴에이지 외에도 우리 시대에 또 다른 종류의 영지주의 유혹인 신학적 전문지식에 대한 매혹과 그에 수반되는 “전문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과 신학 연구에서 박사 학위와 다른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순진한 크리스천들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만 새롭고 본질적인 것을 깨닫게 됟는 것처럼 행동한다. 당연히 속기 쉬운 “순진한 크리스천들”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해야 할 때도 이런 교사들의 고등 교육을 따름으로써 자기도취적인 엘리트주의를 무심코 부추긴다.

주교로서 이레니우스(Irenaeus)는 주교 공동체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시작했다. 또한 그는 진리를 변증하도록 임명된 지도자들과 친교를 맺을 때만 진리를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유일한 수장으로서 로마 주교의 권위를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으로서 주교의 권위를 주장한 것은 교황 수위권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사용되었다.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의 논란이 되는 구절에서 이레니우스는 로마를 교회가 복종해야 하는 장소가 아닌 교회가 모여서 일치를 증명하는 장소로 언급한다.

당시 이레니우스보다 전통에 더 잘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비밀 지식에 더 잘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의 제자였고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원 제자 중 마지막 제자와 멀게나마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저술에 특별한 진정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40일 동안 실제로 자신의 측근에게 비밀 지식을 전달했다면 – 영지(gnosis)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것 가운데 하나 – 이레니우스는 그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누가처럼 이레니우스는 친구를 위해 『이단 논박』이라는 글을 썼다. 그 친구는 그에게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체계에 관해 물었다. 발렌티누스는 일반 무리보다 지식이 풍부한(영지주의적)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여겨지기를 원하는 매력적인 교사였다. 2세기의 가장 중요한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는 종교적인 연민과 열정으로 가득 찬 고등 교육을 받은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교리는 단순한 복음 신앙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발렌티누스는 그 탁월성과 매력으로 인해 잘못된 가르침의 본질을 놓치게 하는 현대 신학자에 비할 수도 있다. 

제1권의 여러 장에서 이레니우스는 발렌티누스의 정교한 체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이단 논박』은 발렌티누스와 성경적 창조론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영지주의적 거부에 대한 최고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영적 실체는 너무 고상해서 기본 물질과의 상호 작용이나 생산으로 자신(그 자체)을 오염시킬 수 없었다. (대부분의 현대 교육 세계가 자연주의 진화에 전념하는 것은 영이 물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영지주의적인 생각만큼이나 많은 전제이다.) 영지주의 관점에서, 물질은 악했고 만물의 근원이 되는 독특한 영적인 “프로아르케(Proarche)”는 물질과 접촉하여 오염될 수 없었다. 따라서 발렌티누스는 에이온(aeons)으로 불리는 영적 실체들의 하향 계열(descending order 내림차순)을 생각했고 이런 실체들은 다른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엄청난 숫자였다. 그리고 예를 들어 이것들은 플레로마(Pleroma, 충만), 아그도우애드(Ogdoas, 여덟 개로 이루어진 그룹), 데캐드(Decad, 열 개로 이루어진 그룹), 듀오데캐드(Duodecad, 열두 개로 이루어진 그룹)를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덜 순수한 영적 실체는 길고 혼란스러운 목록의 끝에 투박한 물질세계로 생성된다.

물론 발렌티누스는 점차 물질로 퇴보하는 영적인 에이온이 어떻게 성경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로 건너뛸 수 있는지를 실제로 설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떻게 물질이 영적인 것의 퇴보를 통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에이온의 확산은 단순히 이런 모순을 감추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그의 탁월함에 유머까지 더하여 이런 모순을 폭로했다. 이레니우스는 상상력있고 매혹적인 이름을 가진 발렌티누스의 에이온 체계를 조사한 후에 창조 교리를 회피하는 부조리함을 풍자하는 글을 썼는데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어떤 설명보다 더 잘 썼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기 위해 동일한 주제 [영에서 물질의 기원]을 다루는 데 있어서 어떤 것도 누군가를 방해하지 않는다. 즉 모든 생각을 능가하는 왕족인 특정한 프로아르케(Proarche)가 존재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물질에 앞서서 존재하는 힘이고 모든 방향에서 우주로 확장된다. 하지만 이것과 함께 내가 조롱박(a Gourd)이라고 부르는 힘이 존재한다. 또한 이 조롱박과 함께 내가 완전한 텅 빔(Utter-Emptiness)이라고 부르는 힘이 존재한다. 이 조롱박과 완전한 텅 빔은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맛있는 (그러나 이것들 자체로부터 떨어져 있기 위해 단순히 생산하지는 않는) 과일을 생산했다. 그리고 과일-언어는 이것을 오이라고 부른다. 이 오이와 함께 다시 내가 멜론으로 부르는 같은 본질을 가진 힘이 존재한다. 이런 힘, 조롱박, 완전한 텅 빔, 오이, 멜론은 발렌티누스의 남아 있는 수많은 정신 착란적인 멜론들을 낳았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그 사상의 포괄성과 명료성으로 인해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그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고 성육신, 그리스도의 사역, 인간 본성을 우리가 잘 이해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영지주의에 대한 그의 성공적인 변증은 그의 다른 사역보다 미래 세대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 우리는 뉴에이지의 무수한 부조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그가 기술했던 정신 착란적인 멜론들의 사례를 따를 수 있을까?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해롤드 O.J. 브라운
해롤드 O.J. 브라운
해롤드 O.J. 브라운 박사 (Dr. Harold O. J. Brown)는 노스캐롤라이나(N.C) 샬롯(Charlotte)에 소재한 리폼드 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