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현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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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2월 22일속상(expiation)와 유화(propitiation)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속죄(atonement)의 대리적 측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속죄와 화목이라는 다소 전문적인 두 단어가 계속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특정 헬라어 단어를 번역하는 데,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 많은 논쟁을 촉발했고, 결국 성경의 일부 번역은 이 단어 중 하나를 사용하고 일부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종종 속죄와 화목의 차이점을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성경에 있지만 일상적인 어휘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들이 성경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 단어들과 관련하여 기준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속상과 유화(expiation and propitiation)
그렇다면 이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속상(贖償, expiation)라는 단어부터 생각해 보자. “ex”라는 접두사는 “~로부터(out of)” 또는 “~에서(from)”를 의미한다. 따라서 속상은 무언가를 제거하거나 없애는 것과 관련 있다. 성경적 용어로 그것은 형벌을 집행하거나 속상을 바침으로써 죄책을 제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화는 속상의 대상과 관련이 있다. 접두사 “pro”는 “~을 위하여(for)”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화는 하나님께 태도의 변화를 가져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적대 관계에서 우리를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신다. 유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분과의 교제와 호의 안으로 회복된다.
어떤 의미에서 유화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가라앉혀지는 것과 관련 있다. 우리는 유화(appeasement)라는 단어가 군사적, 정치적 갈등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유화 정치(politics of appeasement)를 생각한다. 이것은 만약 당신에게 분노의 기습 공격을 감수하기보다는 오히려 느슨하게 칼을 휘두르는 떠들썩한 세계 정복자가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나 그와 같은 영토 덩어리를 줄 것이라는 원칙이다. 당신은 그가 당신의 나라에 들어와 당신을 죽이지 않도록 그를 만족시킬 무언가를 줌으로써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쓴다. 이것은 경건하지 않은 유화의 표현이다. 하지만 당신이 화를 내거나 모욕당할 때 내가 당신의 분노를 풀어주거나 가라앉힌다면 나는 당신의 호의를 회복하고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최고의 업적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를 덮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대항하여 불타오를 것이다.
동일한 헬라어 단어가 때로는 속상, 때로는 유화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속상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의 변화를 이끄는 행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며, 그리스도의 속상 사역의 결과가 유화이다. 즉 하나님의 분노가 가라앉혀졌다. 이 차이는 지급된 몸값과 몸값을 받는 사람의 태도의 차이와 같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노여움을 진정시키는 행위였다
속상과 유화는 함께 노여움을 진정시키는 행위를 이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그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다는 이 생각은 현대 신학자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다는 생각 전체에 대해 매우 격분한다. 그들은 진정시켜야 하는 것, 우리가 그분을 진정시키거나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엄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다는 개념이 신학의 주변적이고, 별로 상관 없는 요점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에서 상기시키고 싶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매우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하겠다. 구원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용어를 빨리 설명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약 70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전투 중에 확실한 패배에서 구출되면 그는 구원을 경험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구원을 경험한다. 누군가의 식물이 시들어가던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로 되살아나면 그 식물은 보존(save)된다. 이것이 성경적 언어이고 실제 우리의 언어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돈을 절약(save)한다. 종소리가 권투 선수를 구한다. 그것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합에서 K.O.로 지는 것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의 경험은 구원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구원을 성경적으로 논의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진술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10절에서 바로 이것을 한다. 데살로니가 1:10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신다”고 언급한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이런 사실 없이는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설교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은 심판에 관한 그분의 몇 가지 경고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 5: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그리고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예수님의 신학은 위기 신학이었다. 위기(crisis)라는 헬라어는 “심판”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설교하신 위기는 이 세상에 임박한 심판의 위기였다. 그런 임박한 심판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구속받지 못한 자들과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분의 진노를 쏟으실 것이다. 쏟아지는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덮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최고의 업적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를 덮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대항하여 불타오를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는 일이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다는 생각에 반대한다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속죄로 덮인 사람들인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된 최고의 위험에서 구속되었다. 진노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죄의 값이 지불된 사람에게는 어떤 진노도 없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다.
